헨리 D.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89-1953, 아편설라[亞扁薛羅])
Ⅰ. 기본사항
이름: Appenzeller, Henry Dodge (아편설라)
- 생몰연도: 1889. 11. 6 – 1953. 12. 1
- 출신 및 소속: 미국 / 북감리회, 연합감리회
- 한국선교기간: 1917. 9 – 1953
4. 연표
1889. 11. 6 서울 정동에서 출생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 수학
1900. 부모님의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
1902. 6. 11 아버지 헨리 G. 아펜젤러 선박사고로 한국에서 소천
1907. 프랭클린 마샬 아카데미 졸업
1911. 프린스턴대학 졸업
1915. 드류신학교 졸업
1917. 뉴욕대학 석사
9. 북감리회 한국선교사로 임명, 내한
1917-1920 인천에서 선교활동
1918. 9. 4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루스 노블과 결혼
1919. 11. 6 – 1924. 9. 17 북감리회 한국연회 서기 역임
1920-1940 배재학교 제4대 교장 역임
1920. 3. 4 삼일운동 일주년을 맞아 배재학당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수개월간 교장인가 취소
1931.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찬송가 개정작업(<신정 찬송가> 발행)에 감리교 대표로 참여
1940.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으로 귀국
1941-1946.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목회자로 사역
1946. 2. 11 군정청 특별정치고문으로 일시 재내한
1948 로스앤젤레스 감리교회 담임목회자
재내한, 배재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NCC 협동총무 역임
1950-1953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위원회 책임자로 구제사역 전개
1953. 11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로 귀국
12. 1 뉴욕 감리교병원에서 64세로 소천
1954. 11. 20 한국으로 유해 귀환 후 정동제일교회에서 사회장 거행, 양화진 안장
5. 가족사항
아내 Appenzeller, Ruth Noble(1894. 6. 14 – 1986. 11. 25/ 한국선교 1917. 9 –1962. 6. 30)
딸 Huyler, Margaret Noble Appenzeller(1919. 4. 23 – 2005. 9. 10)
Appenzeller, Carol Ruth(1924-2003)
아버지 Appenzeller, Henry Gerhart(1858. 2. 6 - 1902. 6. 11 / 한국선교 1885. 4. 5 – 1902. 6. 11)
어머니 Appenzeller, Ella Jane Dodge(1854. 7. 22 - 1916. 9. 30 / 한국선교 1885. 4. 5 – 1901)
누나 Appenzeller, Alice Rebecca(1885. 11. 9 - 1950. 2. 20 / 한국선교 1915 – 1950. 2. 20)
동생 Crom, Ida Hannah(1891. 10. 4 - 1955. 11. 26)
Lacy, Mary Ella(1893 – 1963 / 한국선교 1917 - 1920)
장인 Noble, William Arthur(1866. 9. 13 - 1945. 1. 6 / 한국선교 1892. 10. 17 – 1934. 11.
장모 Noble, Mattie Wilcox(1872. 1. 6 - 1956. 8. 5 / 한국선교 1892. 10. 17 – 1934. 11)
루스 N. 아펜젤러(Ruth Noble Appenzeller, 1894-1986)
Ⅰ. 기본사항
이름: Appenzeller, Ruth Noble
- 생몰연도: 1894. 6. 14 – 1986. 11. 25
- 출신 및 소속: 미국 / 북감리회, 연합감리회
- 한국선교기간: 1917 – 1962. 6. 30
4. 연표
1894. 6. 14 서울에서 북감리회 선교사 윌리엄 A. 노블과 매티 W. 노블의 장녀로 출생
평양 외국인학교 초등학교 과정 수학, 이후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과정과 대학 졸업
1917 북감리회 한국선교사로 내한
1918. 9. 4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헨리 D. 아펜젤러와 결혼
32년간 남편과 함께 한국선교
1940.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으로 귀국, 이후 남편과 함께 하와이 선교
1951 재내한
남편 소천 이후 한국에 남아 서울 정동의 감리회선교부 게스트하우스 책임자로 사역
은평천사원(엔젤스헤이븐) 설립 및 소년단밴드부, 4H 클럽 조직 등 아동복지 사역 전개
1962. 6. 30 은퇴 후 귀국
1986. 11. 25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92세로 소천
1987. 1. 19 한국으로 유해송환 후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 양화진 안장
Ⅱ. 선교사 소개
1. 한국에서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내한 전까지
헨리는 1889년 11월 6일 서울 정동에서 한국 최초의 감리회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와 엘라 D. 아펜젤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자라면서 외국인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900년 부모님의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한다. 안식년 후 가족들을 본국에 남겨두고 홀로 한국으로 돌아간 아버지 헨리 G.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 모임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선박충동사고로 순직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헨리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07년 프랭클린 마샬 아카데미를 졸업 후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하여 1911년 대학 과정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거친 헨리는 1915년 졸업했으며, 이어 뉴욕대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1917년 졸업하였다.
1894년 6월 14일 서울에서 북감리회 선교사 윌리엄 A. 노블과 매티 W. 노블의 장녀로 출생한 루스 역시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평양 외국인학교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귀국하여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과정과 대학을 졸업한다.
2. 대를 이은 한국선교사로 내한, 결혼, 초기 사역
모든 학업 과정을 마친 헨리는 1917년 9월 4일 미국 북감리회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내한했으며, 루스 역시 같은 해 북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 모두 부모님의 대를 이어 한국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것이다.
내한 이듬해 1918년 9월 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한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서의 3년간의 선교사역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한국선교를 감당한다.
3. 아버지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헨리는 아버지가 설립한 배재학교 제4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3월 4일 3·1운동 1주기를 기념하여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일제로부터 학생 처벌에 대한 강요를 받게 된다. 이에 불응한 헨리는 일제에 의해 수개월간 교장 인가를 받지 못하고 평교사로 재직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배재학교 교장으로 인가를 받은 그는 20년간 배재학교의 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한다.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끊임없이 고취시키려 노력한다. 교장인 헨리의 노력 하에 배재학교는 발전을 거듭하였다.
1919년 11월 6일 북감리회 한국연회 서기로 선출된 그는 1924년 9월 17일까지 임원직을 수행하면서 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뒷받침했으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찬송가 개정작업에 감리교 대표로 참여하여 1931년 <신정 찬송가> 발행에도 공헌하는 등 다양한 선교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4.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미국에서의 사역과 재내한
이렇게 23년간 지속된 아펜젤러 부부의 선교활동을 1940년 잠시 마침표를 찍는다. 미일 관계 악화로 인한 일제의 압력으로 이화여대 학장을 역임한 누이 앨리스와 함께 귀국한다. 이후 헨리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의 목회자로 임명되면서 아펜젤러 부부는 하와이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하와이의 한인들을 섬기면서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사역을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5. 미군정청 특별정치고문으로 재내한, 한국전쟁시 피난민 구제사역
해방 이후 이듬해 1946년 2월 11일 헨리가 미군정청 특별정치고문으로 선임되어 다시 아펜젤러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잠시 목회 중이던 미국을 몇 차례 오가는 과정을 거쳐 선교지로 돌아온 헨리는 배재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및 한국기독교연합회(NCC) 협동총무를 역임하면서 배재중고등학교와 한국교회의 재건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위원회 책임자로 선임된 그는 피난민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해주는 구제사역을 전개하였다. 또한 배재중고등학교가 부산에서도 유지되어 수업을 지속하게끔 하는 등 생애 마지막까지 배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계속되었다.
6.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와 귀국 이후 소천, 양화진에 묻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11월 계속된 사역으로 건강을 해친 헨리는 귀국하여 뉴욕 감리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12월 1일 64세로 소천하였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에 따라 이듬해 헨리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1월 2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거행된 사회장 후 양화진에 안장된다.
7. 계속된 한국선교, 귀국, 소천 후 남편 곁으로
헨리의 소천 이후에도 루스는 한국에 남아 선교를 감당하였다. 서울 정동의 감리회선교부 게스트하우스의 관리자로 섬겼으며, 은평천사원(엔젤스헤이븐)의 설립 및 소년단밴드부, 4H 클럽 조직 등 고아와 불우아동을 돌보는 아동복지 사역을 전개한다.
1962년 6월 30일 한국선교사 은퇴 후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1986년 11월 25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92세로 소천하였다. 루스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7년 1월 19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 거행 후 남편 헨리와 함께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헨리 D. 아펜젤러 선교사
* 미국 UMC 디지털 갤러리
1900년경 아펜젤러 선교사 가족들
(좌측부터 헨리 G. 아펜젤러, 2녀 아이다, 장녀 앨리스, 장남 헨리 D., 엘라 제인 아펜젤러, 3녀 메리)
* 미국 루트거스대학교 도서관 “William Elliot Griffis Collection”
1904년 평양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단체사진
(맨 앞줄 우측에서 1번째 앉아있는 루스 선교사, 둘째줄 우측에서 1번째 매티 노블 &맨우측 끝 서있는 윌리엄 A. 노블 선교사)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09년 평양에서 사역하던 감리회 선교사들
(앞줄 좌측에서 1번째 루스, 가운데 줄 좌측에서 2-3번째 앉아있는 윌리엄 A. 노블 선교사 부부)
* 미국 UMC 디지털 갤러리
아펜젤러 가족 사진(1914년)
(윗줄 좌측부터 헨리, 어머니 엘라, 앨리스, 아랫줄 좌측부터 아이다, 메리)
* 소요한. 『한국 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2: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신앙』 .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 2022: 228.
1918년 9월 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아펜젤러 부부의 결혼식
* 소요한. 『한국 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2: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신앙』 .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 2022: 229.
한국인 노인과 함께 한 헨리 D. 아펜젤러 선교사
* 미국 UMC 디지털 갤러리
종로의 구 YMCA 건물 앞에서 한국 어린이들과 함께 한 헨리 D. 아펜젤러 선교사
* 미국 UMC 디지털 갤러리
한국인 농부들이 쓰는 햇빛 가리개 모자를 살펴보는 헨리 D. 아펜젤러 선교사
* 미국 UMC 디지털 갤러리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했고, 아들 헨리 D. 아펜젤러 선교사가 1920년부터 1940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한 배재학교의 모습
* 미국 UMC 디지털 갤러리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배재학교 교직원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헨리 D. 아펜젤러 선교사)
* 소요한. 『한국 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2: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신앙』 .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 2022: 232.
1957년 서울에서 성탄절을 맞은 루스 아펜젤러 선교사
* Find Grave “Ruth Noble Appenzeller” 검색.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79342635/ruth-emily-appenzeller
루스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선교 마지막 시기에 섬긴 은평천사원 원우들과 함께
* 엔젤스헤이븐 공식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ngelsblog&logNo=221564903211&navType=by
함께 은평천사원을 섬긴 존 J. 타이스 선교사와 원우들과 함께 한 루스 아펜젤러 선교사
* 엔젤스헤이븐 공식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ngelsblog&logNo=221564903211&navType=by
헨리 D. 아펜젤러 부부의 양화진 묘비 및 헨리 G. 아펜젤러 추모비
Ⅳ. 참고문헌
[헨리 D. 아펜젤러 기고글]
The Korea Mission Field
“A Fluke, Perhaps?.” KMF Vol.15 No.6 (Jun. 1919): 107-108.
“Korea M. E. Annual Conference.” KMF Vol.16 No.1 (Jan. 1920): 20-21.
“Keeping up With Korea – Manners and Customs.” KMF Vol.16 No.4 (Apr. 1920): 84-86.
“Pai Chai – First, Foremost, and Fruitful.” KMF Vol.18 No.5 (May. 1922): 109-110.
“An Opportune Economical Movement- The Encourgement of home Industries.” KMF Vol.19 No.5 (May. 1923): 92-94.
“About the Language.” KMF Vol.21 No.6 (Jun. 1925): 129-130.
“Words of the Pastor at- The Funeral Servise of Cathie Bonwick.” KMF Vol.23 No.10 (Oct. 1927): 218-219.
“Report on the Union Hymnal.” KMF Vol.25 No.12 (Dec. 1929): 256.
“Effective Korean Preaching.” KMF Vol.28 No.2 (Feb. 1932): 43-44.
“A School Principal Sees the Hospital.” KMF Vol.29 No.9 (Sep. 1933): 197-198.
“Pai Chai’s Fiftieth.” KMF Vol.31 No.8 (Aug. 1935): 175-177.
“What do Second Generation Missionaries Say? - a. My Call to Korea - Twenty Five Years After.” KMF Vol.33 No.11 (Mar. 1937): 46-47.
““Of Whom the Whole Family in Heaven and Earth”- An Appreciation of Bishop Kim Chong Woo.” KMF Vol.35 No.11 (Nov. 1939): 239-242.
““Pointing With Pride”.” KMF Vol.36 No.6 (Jun. 1940): 92-94.
[신문기사]
“교장취소를 당한 문제의 아편설나씨,” <조선일보> 1920년 6월 17일자, 3면.
“취소된 배재교장 영어과 교사로,” <동아일보> 1920년 6월 17일자, 3면.
“배재교 장문제,” <동아일보> 1920년 9월 15일자, 3면.
“배재학당을 대확장,” <조선일보> 1923년 3월 8일자, 3면.
“조선신교육의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좌담회 선생일인 생도이명 고고·역사적 개교,” <조선일보> 1934년 11월 24일자, 2면.
“조선신교육의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이】 고종 칠월 사일에 학당의 설립을 친허,” <조선일보> 1934년 11월 25일자, 2면.
“조선신교육의 측면사 【삼】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추모되는 아교장의 진실한 그 인격,” <조선일보> 1934년 11월 26일자, 2면.
“조선신교육의 측면사 【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아편설나씨 택은 정치범의 피난소,” <조선일보> 1934년 11월 27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오】 생리학 실험대상에 선혈임리한 쇠머리,” <조선일보> 1934년 11월 28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육】 학생월급 안준다고 원조맹휴로 진맹휴,” <조선일보> 1934년 11월 29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칠】 흑립도포에 장죽까지 중세기풍 청년학도,” <조선일보> 1934년 11월 30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팔】 연설을 잔체로 오인 최초 가두 정치연설,” <조선일보> 1934년 12월 2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구】 독립문 정초식 당시 배재는 창가를 담당,” <조선일보> 1934년 12월 3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십】 을미민중운동도 배재에서 처음 배이,” <조선일보> 1934년 12월 4일자, 2면.
“조선신교육 측면사 배재교 오십년 좌담회 【십일】 동행구조타 나를 버린 아씨의 장렬한 최후,” <조선일보> 1934년 12월 5일자, 2면.
“백발 날리는 졸업생 삼대동창생도 출석,” <동아일보> 1935년 6월 9일자, 2면.
“신교육 발상의 모태 배재 오십주 기념식,” <조선일보> 1935년 6월 9일자, 2면.
“전배재교장 아씨 환영회,” <조선일보> 1946년 2월 19일자, 2면.
“전배재교장 아씨 환영회,” <동아일보> 1946년 2월 20일자, 2면.
“아펜셀라 박사 환영회 성대,” <조선일보> 1946년 2월 23일자, 2면.
“성공을 축원하엿다,” <조선일보> 1946년 3월 1일자, 2면.
“어편설라 박사 귀국,” <동아일보> 1946년 6월 6일자, 2면.
“배재 육십일주년 작일 기념식 거행,” <동아일보> 1946년 6월 9일자, 2면.
“소요실정을 조사,” <동아일보> 1946년 10월 24일자, 1면.
“아펜셀라 박사의 서거를 조한다,” <조선일보> 1953년 12월 5일자, 1면.
“아펜셀라 박사 서거,” <조선일보> 1953년 12월 5일자, 2면.
“아펜설라 박사 이일 별세,” <동아일보> 1953년 12월 5일자, 2면.
“명년 여름 한국으로 이장,” <조선일보> 1953년 12월 7일자, 2면.
“내 23일에 집행 아박사 유해이송식,” <동아일보> 1954년 10월 14일자, 2면.
“이십일 이장식 집행 고 『아펜셀라』 박사,” <동아일보> 1954년 11월 16일자, 2면.
“석별! 「아펜셀러」 여사,” <조선일보> 1962년 7월 1일자, 3면.
[단행본]
김승태․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143-144, 145.
소요한. 『한국 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2: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신앙』 .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 2022.
양화진문화원 편.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서울: 홍성사, 2015: 38-41.
서영석. “헨리 D. 아펜젤러.” 『내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1권: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선교』 . 한국교회사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4:
261-265.
[기타자료]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년 9월호): 97-124.
김흥수. “헨리 D. 아펜젤러의 희생적 죽음.” 「기독교사상」 통권 제726호 (2019년 6월호): 6-7.
Find Grave “Henry Dodge Appenzeller” 검색.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79342402/henry-dodge-appenzeller
Find Grave “Ruth Noble Appenzeller” 검색.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79342635/ruth-emily-appenzeller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오헌 실장 정리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2.05.13 16:41
- 수정 2022.06.1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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