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킨슬러(Fransis Kinsler, 1904-1992, 권세열[權世烈])

 

Ⅰ. 기본사항

    이름: Kinsler, Fransis 

 

  1. 생몰연도: 1904. 1. 13 – 1992. 1. 9 
  2. 출신 및 소속: 미국 / 북장로회
  3. 한국선교기간: 1928. 10. 4 – 1970. 9. 14

4. 연표

   1904. 1. 13 미국 필라델피아 저먼타운 출생

   1919. 뉴욕 스토니브룩에서 열린 청년 하기 수양회 참석, 해외선교사로 헌신

   1921. 해도니휠드 고등학교 졸업

   1925. 메리빌대학 졸업

   1926. 프린스턴신학교 입학

   1927-1928. 트렌튼시 제3장로교회 청년부 담당 사역

   1928. 프린스턴신학교를 방문한 조지 매큔의 권면으로 한국선교사 자원, 프린스턴신학교 졸업
        5.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사 임명        
       10. 4 내한       
       12. 만주지역 선교를 위해 조나단 고포스 방문, 하얼빈과 몽골 국경 방문

   1929-1936.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사역(영문학, 성경 강의)

   1929. 2 개척구락부(성경구락부) 사역 시작        
           여름.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몽골 국경지역 전도여행 

   1930. 9. 18 동료선교사 도로시 우드러프와 평양에서 결혼

   1931. 1. 강계의 성경학교에서 아내와 함께 창세기와 로마서 강의        
            2. 쿡, 헨더슨 선교사와 함께 북만주 지역 전도여행 및 사경회
           12. 아내와 함께 성탄절 연휴부터 만주 신빈의 남자성경학교에서 6주간 성경강의

   1931-1938.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 사역(신약 강의)

   1935. 프린스턴신학교 석사 취득

   1938. 3. 숭실전문학교, 성경구락부 폐교

   1940. 7.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진정서 서명       
            10. 일제의 압력으로 아내 도로시와 3자녀 미국으로 귀국      

   1941. 4.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귀국

   1942-1948. 미국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튼 제일장로교회 목회

   1946. 뉴욕 주 롱아일랜드 노회 노회장 역임

   1948. 7.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재임명
             9. 재내한, 장로회신학교 교수 취임

   1949. 이북신도대표회 협동총무로 추대, 성경구락부 운동 재건

   1950. 6 -1953. 6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남아 UN군 통역 및 구호사역 전개 

   1951-1952. 북장로회 재한선교사회 대표(실행위원장) 역임

   1952-1959. 장로회신학교 학감 역임

   1952. 장로회신학교 교장 대행 역임

   1954. 메리빌대학 명예신학 박사 취득

   1955. 『표준성경주해 요한복음』 출간 

   1956-1959. 예장총회 군목부장 역임

   1957-1959, 1964-1965. 군목연합회 위원장 역임

   1957. 『기독교와 민주주의』 출간

   1958. 『로마인서 주석』 출간

   1959. 북장로회 재한선교사회 회장 역임

   1960-1965. 장로회신학교(광나루) 교수

   1960. 예장총회(통합) 군목부장 역임

   1963. 1. 21-22. 연합장로회선교회 구역협동사업위원회 결성, 회장 역임

   1965. 1. 3 영락교회 주최로 그의 회갑예배.        
            3. 15 『인간예수와 유혹』 출간
            3. 27 교육, 문화, 사회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 수여

   1969. 9. 20 영락교회에서 그의 장로회신학대학 명예교수 추대 감사예배

   1970. 9. 14 한국선교사 은퇴 후 귀국

   1970-1976. 뉴저지 웨스트필드교회와 뉴욕 모낙크 장로교회 담임목회

   1978. 성경구락부 창립 50주년을 맞아 내한

   1981. 내한(여수 등대선교회 집회 인도, 장신대 개교 80주년 기념식 참석)

   1984. 성경구락부 창립 56주년을 맞아 내한

   1987-1992. 한빛장로교회 원로목사

   1991. 9 총회신학교 1회 졸업생의 40주년 재상봉회 특별강연 

   1992. 1. 9 미국 캘리포니아 주 두아르테에서 소천           

   2001. 3. 14 아내 도로시 소천        
              9. 15 킨슬러 선교사 부부 유해 양화진 이장 

 

5. 가족사항

   아내 Kinsler, Dorothy Woodruff(1907. 6. 20 – 2001. 3. 14 / 한국선교 1930. 9. 12 – 1970. 9. 14)

       딸 Kinsler, Dorothy Helen(1932 – )

   아들 Kinsler, Arthur Woodruff(권오덕, 1934. 4. 20 –  / 한국선교 1972-2011. 6)
           Kinsler, Fransis Ross(1935 – )

   누나. Kinsler, Marian(권신라, 1894. 8. 26 – 1985 / 한국선교 1922. 8. 22 - 1949)       
            Kinsler, Helen C. (권수량, 1895 – 1975 / 한국선교 1923. 8. 22 - 1932)

      

도로시 W. 킨슬러(Dorothy W. Kinsler, 1907-2001)

 

Ⅰ. 기본사항

    이름: Kinsler, Dorothy Woodruff

 

  1. 생몰연도: 1907. 6. 20 – 2001. 3. 14 
  2. 출신 및 소속: 미국 / 북장로회
  3. 한국선교기간: 1930. 9. 12 – 1970. 9. 14 

4. 연표

   1907. 6. 20 미국 뉴저지 주 트렌튼 출생

         트렌튼고등학교와 윌슨대학 졸업,

   1927-1928. 트렌튼 시 제3장로교회 청년부에서 사역자로 섬기던 프란시스 킨슬러와 만남

   1930. 9. 12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내한        
              9. 18 동료선교사 도로시 우드러프와 평양에서 결혼,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주일학교와 여성성경교육 사역 

   1931. 1. 강계의 성경학교에서 남편과 함께 창세기와 로마서 강의        
           12. 아내와 함께 성탄절 연휴부터 만주 신빈의 남자성경학교에서 6주간 성경강의

   1940. 10 일제의 압력으로 3자녀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    

   1941. 4. 남편 프란시스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귀국

   1942-1948. 남편 프란시스 미국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튼 제일장로교회 목회

   1948. 7.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재임명
         9. 가족들과 함께 재내한, 여자고등학교와 신학교에서 영어교육 사역

   1950. 6 - 1953. 한국전쟁 발발로 딸 헬렌 미국으로 귀국, 두 아들과 함께 도쿄로 피난

   1953-1970. 대구로 돌아와 남편과 성경구락부 사역과 교육 및 피난민, 고아사역 감당        
               전쟁 후 서울에서 유아교육과 정신여자고등학교, 서울여대 등에서 교육사역 전개

   1970. 9. 14 남편과 함께 한국선교사 은퇴 후 귀국 

   1970-1976. 프란시스와 함께 뉴저지 웨스트필드교회와 뉴욕 모낙크 장로교회 목회사역        
              이후 캘리포니아 주 두아르테에서 여생을 보냄       

   1992. 1. 9 남편 프란시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두아르테에서 소천

   2001. 3. 14 미국 캘리포니아 주 두아르테에서 소천                

   

 

Ⅱ. 선교사 소개

 

  1. 출생 및 성장, 선교사로 헌신 

  프란시스 킨슬러는 1904년 1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 저먼타운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장로교 신앙을 지닌 가정의 배경 가운데서 성장한 킨슬러는 15세가 되던 해, 두 누이와 형과 함께 참석한 뉴욕 스토니브룩에서 열린 청년 하기수양회에서 해외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선교사의 비전을 위해 그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21년 해도니휠드고등학교를 졸업 후 메리빌대학에 진학하여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친 킨슬러는 1926년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수업을 받는다. 

 

  2. 프린스턴에서의 신학수업과 한국과의 인연, 교회사역

  그가 프린스턴에 재학하던 시절, 훗날 한국에서 함께 사역할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과 만나 교분을 맺는다. 대표적 인물들로 킨슬러와 동기생이었던 브루스 헌트(한부선)과 최현관 그리고 송창근, 한경직, 윤하영, 해롤드 보켈(옥호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교제하면서 킨슬러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프린스턴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킨슬러는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뉴저지 주 트렌튼의 제3장로교회에서 청년부 담당 사역자로 섬겼는데,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도로시 우드러프를 만나게 된다. 

 

  3. 한국선교사로 내한하기까지

  신학교 졸업을 앞둔 1928년 초 당시 한국의 숭실전문학교 4대 교장으로 내정된 조지 매큔(윤산온) 선교사가 선교특강 차 프린스턴신학교를 방문한다. 이때 매큔은 한국인 사역자들을 도와 만주와 몽골 지역에 선교부를 개척할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킨슬러는 그 말에 감화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자원한다. 

  프린스턴신학교 졸업 후 그해 5월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10월 4일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선교의 첫 발을 내딛는다. 

 

  4. 만주 몽골 지역 선교 준비와 숭실전문학교 교수 사역

  한국에 도착한 킨슬러는 서울에 2달간 머물며 한국어를 배운 뒤 평양으로 옮겨 조지 매큔의 집에 거주하면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다. 자신의 한국선교를 이끈 동기였던 만주와 몽골 지역 선교를 위해 1928년 12월 만주에 있던 조나단 고포스 선교사를 방문했으며, 하얼빈과 몽골 국경 지역을 방문하여 답사를 한다. 

  1929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영문학과 성경을 강의하면서 킨슬러는 그해 여름 숭실전문학교 학생들과 몽골 국경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떠나는 등 만주 몽골 지역 선교부 개척사역에 박차를 가했다.

 

  5. 도로시와의 평양에서 결혼

  그러던 중 1930년 9월 12일 킨슬러의 연인 도로시 우드러프가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내한했으며, 엿새 뒤인 9월 18일 조지 매큔의 주례로 평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1907년 6월 20일 미국 뉴저지 주 트렌튼에서 출생한 도로시는 트렌튼고등학교와 윌슨대학을 졸업했으며, 킨슬러가 내한 전 사역자로 섬긴 트렌튼의 제3장로교회 청년부에 출석하면서 그와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도로시는 남편 킨슬러의 사역을 조력했을 뿐 아니라 이후 40년의 한국 선교기간동안 주일학교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경교육 및 영어교육 등 활발한 사역을 전개한다. 

 

  6. 무산된 만주 몽골 선교

  결혼을 계기로 킨슬러 부부의 선교사역을 탄력을 받는다. 평양에서 킨슬러는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도로시는 주일학교와 여성성경공부 사역을 감당했으며, 1931년 1월 강계의 성경학교에서 킨슬러 부부는 창세기와 로마서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만주 몽골 선교부 개설을 위한 헌신 또한 계속된다. 킨슬러는 그해 2월 쿡, 헨더슨 선교사와 함께 북만주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 전도와 사경회를 인도했으며, 12월 아내와 함께 성탄절 연휴부터 6주간 만주 신빈의 남자성경학교에서 성경 강의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주 몽골 선교는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큰 어려움에 빠진다. 이듬해 1932년 만주를 방문한 킨슬러가 기차를 갈아타는 도중 일본 관리에 의해 미국 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소지품 검사를 받았으며, 그해 10월 16일 일본군에 의해 강제 이주되는 한국인들과 동행하던 신빈의 핸더슨 선교사가 총격으로 소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러한 가운데 킨슬러 부부는 만주 몽골 선교를 접고 평양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한다.     

  

  7. 성경 구락부 사역

  1929년 2월의 어느 날 밤 평양에서 길을 가던 킨슬러는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소년 6명을 발견한다. 그는 이들을 데려다가 평양 시내 기독교서점 광문서관 2층에 머물게 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킨슬러를 찾아온다. 그의 사역은  점차 평양 가운데 알려졌으며, 마포삼열 선교사가 그의 사역을 지원하고 함께 모임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이것이 ‘개척 구락부(성경 구락부)’의 시작이 된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근거하여 불우한 아동,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지육, 체육, 봉사, 종교 등 네 가지 정신에 입각한 전인신앙교육을 목표로 전개된 킨슬러의 개척 구락부 운동은 점차 활기를 띤다. 2년 후인 1931년 평양에 7개 구락부가 개설되었으며, 1934년에는 13개 구락부로 확장되어 1,500명의 아동,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는다. 

  교사는 주로 킨슬러가 가르친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이 맡았는데, 그는 그들에게 근로장학금을 지급하면서 구락부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이후 평양장로회신학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숭실중고등학교 등 더 많은 학교의 학생들로 확대되었으며, 훗날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들인 방지일, 배민수, 길진경, 강신명, 김양선, 김치선, 안광국, 박창목 등이 교사로 함께 참여하였다. 

  1934년 킨슬러의 개척 구락부 운동을 공산주의 활동으로 오해했던 일본인 교육 조사관의 조언으로 ‘성경구락부’로 개칭되었는데, 이 성경구락부 사역은 킨슬러가 자신의 한국선교 42년을 통틀어 가장 마음을 쏟아 헌신하고 애정을 가진 섬김이었다.  

 

  8. 신사참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 강제추방

  숭실전문학교를 떠나 1936년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 전임교수로 옮긴 킨슬러는 1938년 폐교 시까지 그곳에서 교수사역을 감당한다. 이사야, 요한복음,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신앙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935년 말부터 신사참배에 대한 노골적인 일제의 압력과 강요 앞에 1938년 3월 4일 그가 사역했던 숭실전문학교와 성경구락부가 자진 폐교했으며, 이어 평양장로회신학교도 문을 닫는다. 킨슬러는 학생들과 계속해서 비밀리에 성경공부를 하려고 애썼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사참배에 강경한 입장을 취한 킨슬러는 1938년 9월 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25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항의서를 제출한다. 또한 그가 속한 북장로회 선교부가 미션스쿨의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 타협안을 제시하자 킨슬러는 1940년 7월초 7명의 북장로회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부의 입장에 반대를 표명하는 ‘진정서’에 서명했으며, 7월 4일 미국으로 떠나는 해리 로즈에게 선교본부에 전달해줄 것을 직접 요청하였다. 

  계속되는 일제의 압력 가운데 그해 10월 아내 도로시와 세 자녀를 먼저 미국으로 귀국시키고, 킨슬러는 평양에 남아 『요한복음 성경주석』 집필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이듬해 4월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강제추방되었다.     

         

  9. 미국에서의 목회

  미국으로 귀국한 킨슬러는 1942년부터 1948년까지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튼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했으며, 1946년에는 북장로회 뉴욕 주 롱아일랜드 노회의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10. 재내한과 두 번째 한국선교

  그러나 한국을 향한 사랑과 마음을 끊을 수 없었던 킨슬러는 안정된 미국에서의 목회생활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1948년 7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재임명된 그는 그해 9월 재내한하였다. 내한 이후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사역하면서 해방 이후 신학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던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애썼다. 

  이듬해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이북신도대표회 협동총무로 추대된 킨슬러는 북장로교 선교부와 이북신도대표회를 연결해 한국장로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했으며, 성경구락부 운동의 재건을 위해 힘쓴다. 도로시 선교사 또한 여자고등학교와 신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등 교육선교를 전개하였다. 

 

  11. 한국전쟁과 구호사역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킨슬러의 가족은 잠시 흩어진다. 딸 헬렌을 미국으로 귀국시키고, 도로시와 두 아들은 도쿄로 피신을 떠났다. 킨슬러는 계속 한국에 남아 안두화 선교사 등과 함께 UN군 통역 및 피난민들의 구호사역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1952년까지 북장로회 재한선교사회 대표(실행위원장)를 역임하기도 한 그는 예장총회 군목부장(1956-1959, 1960)과 군목연합회 위원장(1957-1959, 1964-1965)을 역임하는 등 군목제도의 정착에도 큰 역할을 감당했다. 

 

 

 

 12. 신학교육과 저술사역

  한국전쟁의 혼란 가운데서도 킨슬러는 신학교를 떠날 수 없었다. 1951년 대구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에서도 학감과 교수로서 가르치면서 1952년에는 안식년을 떠난 감부열 선교사 대신 교장 대행을 역임하는 등 전쟁기간 중 신학교육 사역에도 힘쓴다.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던 1959년까지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섬긴 그는 1960년 이후에는 통합측에 합류하여 광장동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저술에도 힘쓴 킨슬러는 『표준성경주해 요한복음』 (1955), 『기독교와 민주주의』 (1957), 『로마인서 주석』 (1958), 『인간예수와 유혹』 (1965)을 출간하는 등 한국교회의 신학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13. 전후의 성경구락부 운동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사역을 감당한 그였지만 킨슬러가 재내한 이후에도 큰 열정을 쏟은 사역은 성경구락부 운동이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들과 고아들을 대상으로 성경구락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킨슬러는 전재민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에 성경구락부를 설치했으며, 아동들과 청소년들의 전인적 신앙교육에 힘썼다. 이러한 성경구락부 운동은 정부의 교육정책이 자리 잡기 이전까지 전후 혼란의 시기에 대안교육의 역할을 감당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초등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으로 정착되자, 변화의 흐름에 맞추어 성경구락부는 중고등과정을 신설했으며, 정규학교로 전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앙구락부 운동은 신앙교육과 교회의 전도 뿐 아니라 사회통합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5년 3월 27일 킨슬러에게 교육, 문화, 사회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14. 한국선교사 은퇴와 귀국 이후

  1969년 9월 장로회신학대학의 첫 명예교수로 추대된 킨슬러는 이듬해 9월 14일 42년의 한국선교를 마치고 귀국한다. 이후 1970년부터 1976년까지 뉴저지의 웨스트필드교회와 뉴욕 모낙크 장로교회에서 담임목회자로 섬겼으며, 캘리포니아의 두아르테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15. 소천 그리고 부인과 함께 한국 땅에 묻히다

  은퇴 이후에도 수차례(1978, 1981, 1984년) 한국을 방문했으며 소천하기 1년 전인 1991년 9월에는 총회신학교 1회 졸업생들의 40주년 재상봉회에서 특별강연을 맡기도 한다. 인생 말년까지 한국사랑의 삶을 살았던 킨슬러는 1992년 1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두아르테에서 88세로 소천하였다. 

  1월 13일 그가 원로목사로 있던 한빛교회의 주관으로 킨슬러와 함께 사역했던 은퇴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예배가 열렸으며, 1월 27일 장로회신학대학과 대한청소년성경 구락부의 주최로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관에서 추모예배를 가졌다. 

  이후 미국에 묻혀 있던 킨슬러의 유해는 2001년 3월 14일 소천한 아내 도로시의 유해와 함께 ‘제2의 조국’ 한국으로 옮겨져 2001년 9월 15일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된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1928년 프린스턴신학교 동문 한국인들과 내한선교사들
(앞줄 맨좌측 킨슬러 선교사, 둘째줄 좌측에서 1번째 해롤드 보켈, 2번째 한경직 목사, 우측에서 1번째 브루스 헌트)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30년 9월 평양에서 열린 프란시스와 도로시 킨슬러 선교사의 결혼사진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30년 평양 성경구락부에서 체조 중인 아이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34년 평양의 성경구락부 아이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38년 11월 평양에서 킨슬러 선교사 부부

*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도서관 “Shannon McCune Collection”

 

  

1936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들
(뒷줄 우측에서 2번째 킨슬러 선교사, 첫째줄 좌측에서 1번째 로버츠 선교사, 3번째 박형룡 박사)

* 박용규, < 한국기독교회사 2권 >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9), 638.

 

1941년 3월 3일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되기 전 평양선교부 선교사들
(맨 뒷줄 서있는 킨슬러 선교사)
* 미국 PCUSA Historical Society

 

1948년 9월 20일 한국으로 재파송되는 킨슬러 선교사 가족들을 위해 그가 시무하던 이스트햄프턴 제일장로교회에서 열린 환송연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East Hampton 홈페이지
https://www.fpceh.org/rev-kinsler

 

1949년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연례회의(맨뒷줄 우측에서 5, 6번째 킨슬러 부부)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52년 성경구락부 어린이들과 함께 한 킨슬러(뒷줄 맨우측)

* 미국 PCUSA Historical Society

 

1955년 6월 28일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재한선교사들의 모임
(맨앞줄 좌측에서 2번째 킨슬러 선교사)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56년 대구에서 모인 숭실대 재건에 참여한 선교사들
(첫째줄 우측에서 2-3번째 킨슬러 선교사 부부)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56 혹은 1957년 보켈, 킨슬러, 스티븐슨 선교사 부부
(앞줄 맨좌측 도로시, 둘째줄 가운데 프란시스)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65년 성경구락부 운동의 중앙위원들과 함께 한 킨슬러 선교사(앞줄 좌측에서 3번째)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65년 신학교의 성경구락부 리더들과 함께 한 킨슬러 선교사(앞줄 좌측에서 4번째)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65년 3월 영락교회에서 열린 권세열 선교사의 회갑 축하연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81년 방한 시 마삼락 선교사 부부와 함께 한 킨슬러 선교사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81년 방한 시 마삼락 선교사 부부와 성경구락부 임원들과 함께 한 킨슬러 선교사(뒷줄 우측에서 4번째)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킨슬러 선교사의 생애요약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킨슬러 선교사의 이력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킨슬러 선교사의 자서전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도로시 킨슬러 선교사의 생애요약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40년 7월 북장로회 8인의 젊은 선교사들의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보내는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문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40년 7월 4일 미국으로 들어가는 해리 로즈 선교사에게 위 입장문을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전달해줄 것을
요청하는 킨슬러 선교사의 서신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한국의 성경구락부 사역을 알리는 영문소식지(1957년 9월)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92년 1월 13일 미국에서 열린 킨슬러 선교사의 추모예배 순서지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1992년 1월 27일 장로회신학대학과 대한청소년성경 구락부 주관으로 열린 킨슬러 선교사 추모예배 순서지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킨슬러 선교사 추모예배 시 축도하는 한경직 목사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도로시 W. 킨슬러 선교사의 장례 참석자들에 대한 감사인사와 부모님의 양화진 안장을 알리는
아들 아서 킨슬러의 편지(2001. 4. 12)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킨슬러 선교사 부부의 양화진 묘비와 추모비

 

 

Ⅳ. 참고문헌

 

[프란시스 킨슬러 저서]

권세열. 『표준성경주해 요한복음』.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5. 

권세열. 『기독교와 민주주의』.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7. 

권세열. 『로마인서 주석』.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8.

권세열. 『인간예수와 유혹』.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5.  

 

[프란시스 킨슬러 기고글]

The Korea Mission Field

“Bible Clubs for Children in Korea.” KMF Vol.31 No.1 (Jan. 1935): 14-15.

 

신학지남

“일은아츰 영적교제와 그 실제.” 「신학지남」 Vol.18 No.6 (1936): 13-20.

“그리스도의 명칭.” 「신학지남」 Vol.23 No.1 (1954): 12-20.

“에큐메니칼운동 약사.” 「신학지남」 Vol.25 No.1 (1958): 23-25.

 

기독교사상

권세열 외 3명, “군의 정신무장과 군목의 역할.” 「기독교사상」 Vol.13 No.2 (1969. 2): 91-97.

 

[프란시스 킨슬러 관련자료]

Missionaries - Kinsler, Francis, 8 of 8

*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Korea Collection”
https://commons.ptsem.edu/?qtext=series-id%3akoreamissfiles_kinsler%20sort%3aseries&series-title=Korea%20Missionary%20Files%20of%20Francis%20Kinsler

 

[단행본]

Rhodes, Harry A.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 Seoul, Chosen: Chose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934.

Rhodes, Harry A and Archibald Campbell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935-1959. New York: 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65. 

김득렬 편. 『권세열 선교사 전기: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서울: 도서출판 카이로스, 2008. 

김승태․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 .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433,  

미국장로교한국선교회 편. 『미국장로교 내한 선교사 총람 1884~2020』 . 서울: 미국장로교선교회, 2020: 100. 

숭실대학교 뿌리찾기 위원회 편. 『권세열: 조선의 풍경』 . 서울: 숭실대학교출판부, 2017.  

양화진문화원 편.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서울: 홍성사, 2015: 184-187. 

조상열. “프란시스 킨슬러, 도로시 W. 킨슬러.” 『내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1권: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선교』 . 한국교회사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4: 131-134.

 

[관련논문]

이선이, “킨슬러가(家)의 현지인 중심적 선교,” 「선교신학」 제59호 (2020): 207-236.

장금현, “프란시스 킨슬러와 성경구락부 운동,” 「신학과 실천」 제68호 (2020): 527-553.

장금현, “해방 후 경북지역 성경구락부의 변화 – 경북 경안노회를 중심으로,” 「대학과 선교」 제43집 (2020): 93-127.

정병준, “권세열 선교사의 생애와 한국교회에 남긴 공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5호 (2021. 9. 25): 147-181.

 

[신문기사]

“선교사측 항의 반려키로 결정,” <조선일보> 1938년 9월 15일자, 2면. 

“당국의 주의경고로 결의문을 삭제? 참배항의문은 반환,” <동아일보> 1938년 9월 15일자, 2면. 

“미선교사 킨박사에 문화훈장 수여,” <동아일보> 1965년 3월 27일자, 7면. 

 

[기타 자료]

“Fransis Kinsler” from FindGrave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75794085/francis-kinsler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East Hampton 홈페이지
https://www.fpceh.org/rev-kinsler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오헌 실장 정리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2.04.2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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