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에스더 (Esther Park, 1876-1910, 박애시덕[朴愛施德] 김점동[金點童])
고난의 시대 어둠을 밝힌 여인, 한국인 최초의 여자 의사, 박 에스더(1876-1910)
들어가면서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1910년 한일병탄까지 우리 민족은 가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1876년 일본의 강화도조약,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1910년 한일병탄을 비롯한 민족적 비극이 이 기간에 일어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우리 민족의 수난 역사와 너무도 정확하게 맞물려 한 평생을 살아간 독실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1876년 태어나 1910년 세상을 떠난 박에스더(朴愛施德, 1876-1910)이다.
박에스더는 한국의 최초의 여자의사, 최초의 여자의학박사, 그리고 감리교 여전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학술적 연구논문은 불과 몇 편에 불과하다. 2007년 이방원의 “박에스더(1877-1910)의 생애와 의료선교활동,” 2009년 정민재의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그리고 윤선자의 “한말 박에스더의 미국 유학과 의료활동” 등 3편이 있다. 이방원은 의료사역에 초점을 맞추었고, 정민재와 윤선자는 일반 사학적인 면에서 박에스더를 접근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당시의 배경 속에서 선교사-교회사적인 접근이 없어 필자는 그녀의 생애를 통시적으로 고찰하되 이전의 연구와의 연속성을 지니면서도 선교사-교회사적 관점에서 집중 조명하려고 한다.
박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본래의 이름은 김점동(金點童)이다. 그녀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던 1876년 3월 16일 서울 정동(貞洞)에서 광산김씨 김홍택과 연안이씨 사이의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첫째 딸은 농부와 결혼했고, 둘째 딸 김 마리아는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 전신)을 졸업하고 신정우(신정우)와 결혼한 후 정신여학당의 학감 사감 등을 역임하며 개화기 정신여학교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셋째 딸이 점동이었고, 넷째 딸 배세는 제1회 세브란스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했다. 당시 자녀들이 서양의 신교육을 받으며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부친 김홍택이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 고용되어 일했기 때문이다.
I.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들과의 만남과 이화학당 재학(1886-1891)
김점동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이화학당에 입학해 서양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만나면서였다. 점동은 1886년 11월 10살 때 아펜젤러 소개로 스크랜톤 부인(Mary F. Scranton, 1832-1909)을 알게 되었고,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 되었다.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제공하고, 새로운 서양기독교 교리가 딸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부친이 그녀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김점동은 결혼하기 얼마 전 엘라 루이스(Ella A. Lewis) 선교사에게 이렇게 들려주었다.
“나는 매우 어린 소녀일 때 나의 아버지가 아펜젤러 선교사를 위해 일하러 가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아펜젤러는 나의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스크랜톤 여사의 학교에 데려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스크랜톤 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때는 상당히 추운 날이어서 스크랜톤 여사가 내게 난로 가까이 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전에 난로를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처음에는 그녀가 나를 난로에 집어넣어 불에 태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약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친절,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는 그녀가 나를 불에 태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단시 나 외에 학교에 3명의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쌀 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옳고 그름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가 아주 열심히 일하셔야 했지만 나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점동은 참 영리하고 머리가 비상했다. 이화학당에서 3명의 정규학생을 선발할 때 그녀도 그 중의 한 명으로 선발되었고, 미국 감리회해외여선교회의 밸류 조력회(the Belluvue Auxiliary)의 장학생에도 추천되어 이화학당을 졸업할 때까지 매년 40달러의 장학금을 지급받았다. 당시 40달러는 상당히 많은 금액이었다. 점동은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 성경, 요리문답, 영어,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빨리 배웠고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가 다른 여학생들보다 빨랐다. 그러면서도 영적으로 상당히 조숙했다. 이화학당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조금씩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복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점동은 깨끗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느껴 그것을 놓고 은밀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깊은 영적 체험을 한 것은 이화학당에 입학한지 거의 2년이 된 1888년 그녀 나이 열두 살 때였다. 그해 우기가 다가올 즈음 이전보다 더 큰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점동은 방금 배운 구약 성경에 나오는 노아 때에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홍수로 이 민족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같은 룸메이트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들도 그녀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점동은 그들에게 함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정결한 심령을 달라고 간구하자고 제안했다. 그들 모두는 그렇게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자의 심령을 평안으로 가득 채워주셨다. 그날 밤 점동과 다른 소녀들은 죄 용서를 경험했고 모두 평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에스더는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처음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배웠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죄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12살 때 큰 천둥폭풍이 왔고 밤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나는 두려웠고,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 노아가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수잔나에게 우리가 잘 믿지 않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익사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알지 못해 그저 자녀가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씀드리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매일 밤 기도를 드렸으며 매일 마가복음을 공부했습니다. 좀 더 자라면서 나는 더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의 선생님들께 더 잘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나의 죄에 관하여 깨닫기 시작했고 어떻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러 오셨는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느꼈고 나는 회개하고 그를 믿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다시 죄를 지을 것이 두려워 나는 하나님께 나를 용서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 심령에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 나는 매우 행복했습니다.”
위 간증대로 그날의 특별한 경험은 점동을 한층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그녀는 그 다음날 저녁 그녀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꽃으로 방을 장식하고 찬송가 몇 권을 가져다 놓고 다른 소녀들을 자기 방으로 초청해 그녀의 심령에 찾아온 변화를 들려주면서 선교사들에게서 본 대로 작은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그 밤에 점동의 방에 모인 소녀들은 매일 저녁 그 방에서 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한국인 선생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도 같이 동참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다른 여인들도 그 기도회에 합류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화학당의 기도회는 한국에서 첫 번째 여성기도회로 발전했다.
김점동의 회심을 감리교의 요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가의 회심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회심은 그녀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무엇보다 회심 후에 두 가지가 변화가 그녀에게 뚜렷하게 나타났다. 하나는 그녀가 구원의 확신을 분명하게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점동이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 일이었다.
1888년 특별한 회심을 경험한 에스더의 신앙은 날로 더욱 더 성장했다. 세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그녀 안에 일어났다. 그녀의 표현을 직접 빌린다면 “나는 스크랜톤 여사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러자 나는 더 행복해졌다.” 1891년 1월 25일 주일 아침 점동은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후 김점동은 에스더로 불리기 시작했다. 점동이 세례를 받던 바로 그날 로제타 셔우드 홀은 그녀의 일기에 점동의 세례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점동도 있는데 그녀는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에스더는 오늘 정말 기쁘다고 내게 말했다.” 세례를 받은 후 그녀는 김 에스더로 불리기 시작했다. “내가 세례를 받은 후 내가 언제나 옳은 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수업을 빼 먹으면 짜증이 났으며, 그런 후 내가 하나님과 선생님들을 불쾌하게 해드렸기 때문에 이로 인해 죄송한 마음이 내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예수님께 간구했고 그리고 나서 선생님들께 나를 용서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II. 로제타 셔우드 홀과의 만남과 의학에 대한 관심(1891-1894)
에스더가 로제타 셔우드를 만난 것은 특별한 은혜요, 섭리였다. 로제타는 에스더를 친 여동생처럼 사랑하고 훗날 의사로 키운 북감리교 의료 선교사였다. 에스더가 로제타를 만난 것은 1890년 로제타가 북감리회 여선교회 파송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지 며칠 되지 않아 그녀의 통역을 맡으면서였다. 로제타는 1887년 10월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해 1889년까지 보구여관에서 근무하던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건강문제로 귀국하자 그녀의 사역을 이어받을 의사로 입국했다. 그녀는 바로 입국하자마자 바로 의료사역을 시작해야 하였기 때문에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한글을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의료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하는 로제타의 형편을 감안해서 에스더를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막 의료사역을 시작한 로제타의 통역으로 에스더가 추천된 것이다. 그녀가 추천된 것은 1886년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 영어실력이 놀랍게 향상되어 학생들 중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1890년 10월 24일부터 에스더는 로제타를 돕기 시작했다. 10월 24일 금요일 로제타는 그녀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진료소에서는 학교 여학생 중 하나인 점동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진료했다. 그녀는 통역을 곧 잘한다. ... 점동은 튼튼하고 건강한 열네 살 소녀이며 영어도 잘 구사한다. 재빠르고 영리하여 훈련시키고 싶도록 탐나는 학생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늘 저녁에 그녀 스스로 나를 도와주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이후 에스더는 로제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90년 11월 11일 로제타는 4년 전 화상으로 오른손 손바닥에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손가락”이 붙어버린 시골에서 올라온 한 16살의 소녀를 수술했다. 이 소녀의 다른 곳 피부를 떼어내어 피부이식을 해야하는데 그녀가 거절하자 로제타는 자신의 피부를 떼어 환자에게 이식했다. 12월 22일 월요일 일기에 기록한대로 환자의 “속살이 훤히 드러났고 보기에 아주 흉했다. 그래서 나는 피부이식 수술을 시작했다. 먼저 환자의 팔에서 피부를 한 조각 떼어내 이식했다. 그러나 이식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환자는 더 이상의 이식을 거부했다. 그래서 내 팔에서 세 조작을 떼어냈고 좀 더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 때 환자 외에는 나밖에 없었고 병원 여직원도 극구 말렸다. ... 내가 한국 소녀에게 피부까지 떼어주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자신의 피부를 다른 사람 그것도 한국인을 위해 떼어주는 로제타의 모습에 에스더와 한국인들 그리고 그녀의 동료 선교사들도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로제타의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듣거나 본 주변의 여러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피부를 제공하겠다고 했고 16살의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도 자신의 다른 부분의 피부를 떼어 피부이식을 하는 것을 수락했다.
1891년 3월과 4월 로제타는 네 건의 구순구개열 수술(언청이 수술)을 했다. 이 때 에스더가 아주 훌륭하게 로제타를 보조해 주었다. 불치의 병으로 이해되던 언청이가 수술을 통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도하고 에스더는 자신도 장차 서양의사가 되고 싶었다. 에스더는 영어를 곧 잘하고 의학에 관심도 높았으며 매사에 열심을 다해 로제타를 도왔다. 로제타는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녀의 남다른 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로제타는 에스더의 돈독한 신앙심,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성실함, 의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확인하고 에스더와 다른 몇 명의 소녀들에게 영어와 의학 기초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1891년 3월 7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휴가 이후 나는 다섯 명의 여학생들에게 생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에스더, 오와카 양, 수잔나, 봉선 그리고 애니 등이다. 이 학생들은 최상급반 영어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도 세 번째 영어 교본을 읽고 있는 수준이라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제 처음으로 시험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최초의 필기시험인 셈이다. 모두들 훌륭히 해냈다. 에스더는 아주 잘하고 매우 총명하다. 그러나 아주 뛰어나지는 않다. 하지만 꾸준히 잘하고 있고, 한번 배운 것은 잊지 않고 활용을 잘 한다. 그녀의 것과 봉선이의 것은 거의 만점에 가까워 100점을 줬다.”
로제타의 일기는 에스더가 학생들 가운데 가장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었음을 보여준다. 로제타는 에스더를 장차 의사로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생리학, 인체학, 그리고 약물배합을 가르쳤다. 로제타는 에스더가 잘 이해하고 따르고 맡겨진 일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점점 더 에스더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보수를 지급하며 데리고 있으려는 마음까지 생겼다. 로제타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아직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점동이가 병원에서 좀 더 나를 잘 도울 수 있게 되면 보수를 지급할 예정이다. 그녀는 병원에서 내게 매우 필요한 사람이며, 로스와일러 양이 통역을 위해서 내려와야 하는 수고도 덜어주고 있다. 오와카 양이 병가를 낸 동안 점동은 기구들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약물 배합도 오와카 양만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수술을 할 때 피를 닦아내는 등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나를 돕는다. 처음에는 그녀 자신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나 자신에게도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날마다 더 나를 감탄케 한다.”
로제타는 에스더가 매우 근면한 학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기초의학을 위한 가장 기본과목인 생리학도 가르쳤다. 에스더는 “특히 생리학을 잘하는데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빨리 배웠다.” 로제타의 표현을 빌린다면 “내가 인체 외부에서부터 피부에 대해 설명을 채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벌써 뼈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해부실에서 다른 여학생들은 힘들어했지만 에스더는 역겨운 것도 잘 참아냈다. 로제타는 에스더에 대해 이렇게 높이 평가했다. “나는 그녀가 좋은 의사가 될 진정한 용기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생각이 아주 빠르다. 내가 환자들에게 필요한 질문을 다하고 증상을 모두 확인할 때쯤이면, 이미 그녀는 내가 어떤 약을 처방할 것인지 알고 있다. ... 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계속 이 길을 간다면, 적당한 때 미국에 보내 학위를 받게 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라 생각된다.” 에스더 역시 로제타를 참 많이 사랑했다.
“2년 전[1890년]에 셔우드 박사와 벵겔 양이 한국에 왔습니다. 로스와일러는 우리에게 지리학과 산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벵겔 양은 우리에게 과학과 다른 지리를 가르쳤고 올해에는 그녀가 내게 오르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내 평생 동안 영어와 오르간을 잘 공부하고 싶습니다. 셔우드 박사는 생리학을 가르쳐주었고 그녀는 주일학교에서 우리 반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후 나는 셔우드 박사를 돕기 위해 광혜여원에 내려가 약을 조제하고 그녀를 위해 통역을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아주 매우 좋아합니다. 나는 우리가 항상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결혼을 했습니다.”
에스더가 로제타로부터 사랑과 깊은 신뢰를 받으며 장차 의학도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때 당시 결혼 풍습에 따라 에스더는 부모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혼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에스더는 꼭 결혼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었다. 그녀는 “결혼해야 된다는 생각을 무척 싫어했다.” 대면해 보지 않은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미국 소녀들처럼 결혼을 하든 말든 그녀가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에스더는 “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형제와 자매로 만드시지 않고 남편과 아내로 만드셨는지 납득이 안 간다”고 로제타에게 말했다. 심지어 결혼이 싫어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에스더는 결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에스더는 결혼을 해야 할 시기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계속 그것을 피하고 싶어 했다.”
사실 로제타 자신도 처음에 에스더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것, 그녀의 신앙과 신분에 걸맞는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결혼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로제타는 결혼 전에 에스더의 결혼과 관련하여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나는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수년간, 적어도 한국의 상황이 달라지고 그녀가 스스로 선한 사역을 도울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로제타는 자신이 혼자 지낼 때보다 결혼하고 나서 훨씬 더 심리적 안정과 행복이 찾아온 것을 발견하고 에스더가 결혼하는 쪽이 더 났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에스더도 조금씩 결혼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에스더의 갈등을 옆에서 지켜본 로제타가 볼 때도 에스더 마음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그녀의 생각을 약간 되돌린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로제타가 정확하게 관찰한 것이다. 로제타의 결혼이 에스더의 마음을 상당히 바꾸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결혼 전 에스더가 루이스 양에게 고백한 내용과도 상당히 일치한다.
“[로제타가 결혼할] 당시는 내가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한국관습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만약 내가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좋은 남자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놓은 곳 어디든지 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다.”
결혼을 극구 반대하던 에스더 마음에 결혼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스크랜톤 여사도 그렇고 로제타와 남편 홀 박사도 에스더의 배우자감을 열심히 찾았다. 홀 박사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 중에 괜찮다고 여겨지는 한 청년을 발견하고 그에게 어떤 아내를 맞기를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저 가정에서 빨래를 해주고 음식을 준비하는 그런 여인을 원하는지, 여성이 신앙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도 하는 사람을 원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후자가 좋다고 말했다. 홀 박사는 그러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로제타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그들의 중재로 둘의 혼사가 오고갔다. 그 남자는 홀 박사의 전도로 회심한 박여선(朴裕山)이었다. 박여선은 믿는 청년이었지만 가정이 좋거나 점동처럼 많이 교육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점동의 어머니가 그를 처음에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것은 로제타의 일기에 있는 에스더의 결혼관과 결혼에 얽힌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닥터 홀이 데리고 있는 사람 중에서 에스더에게 적당한 신랑감을 발견했다. 스크랜턴 여사는 에스더를 시집보내려고 서두르고 있다. 열여섯 살인 에스더는 키도 크다. 남자의 이름은 박여선인데 에스더의 어머니는 여선이 떠돌이 노동자였던 때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선의 선친이 훈장을 하다 5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맏아들로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자 겨우 승낙했다. 에스더는 이 결혼 문제에 대해 참으로 훌륭한 편지를 내게 보냈다. 에스더가 자기보다 지체가 낮은 사람과 결혼하라는 말에 기분이 상해서 우리를 원망해도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실제로 여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거의 다 자기 집안보다 나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스런 소녀는 결혼을 이러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우리는 적어도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 박여선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던 그녀의 모친이 할 수 없이 승낙했다는 사실과 보통 여자들이 당시도 그랬지만 자기보다 한 단계 더 나은 신분의 남자를 배우자로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에스더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결혼관에 있어서 그녀가 당시의 여자들과 달랐음이 분명하다. 로제타는 주의 깊게 그녀를 관찰하면서 에스더의 남다른 면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배우자를 놓고 깊이 고민하던 에스더는 자신의 마음을 로제타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토로했다.
“나의 소중한 자매여, 당신이 어제 보낸 편지를 받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는 여지껏 말하지 않았던 제 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흘 동안 저는 뜬 눈으로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습은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남자를 싫어해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
로제타와는 11살 차이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나이차였지만 둘은 자매로 생각하고 가까이 지냈다. 에스더는 로제타를 ‘자매’라고 불렀고 둘은 마음을 완전히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도 에스더를 이모라고 생각했다. 에스더는 마음을 열고 마음속의 생각도 나누며 로제타를 언니처럼 의지했다. 에스더로부터 편지를 받던 이날 로제타는 이 편지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다음, 그녀 일기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멘트를 추가했다. “사랑하는 에스더,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나는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
결혼의 문제와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세례 받은 지 2년이 지난 1893년 초에 접어들어 그녀의 영적인 상태는 매우 급속하게 성숙해졌다. 에스더는 엘라 루이스 양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부자가 되거나 많은 아름다운 물건들을 갖는 것을 소망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지난 해 나는 예수님에 관하여 아주 아주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올해는 온 시간 나의 마음에 그분을 생각하고 있으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해 나는 착한 소녀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올해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지난해 페인양이 한국에 와서 우리들에게 구약을 가르쳐주었는데 만약 어느 누가 내게 성경을 가르쳐준다면 참 많이 기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내게 그분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더 많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올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항상 예수님을 사랑하고 매일 그분을 위해 일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나의 모든 희망이고 평화입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많은 미국인 교사들을 보내주셔서 한국 사람들을 속히 구원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모든 미국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결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에스더는 1893년 5월 5일 약혼하고 5월 24일 박여선과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녀는 김에스더가 아닌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리기 시작했다. 박여선은 1868년 9월 21일생으로 김점동보다 8살 연상이었다. 로제타는 에스더를 친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그녀를 장차 의사로 키우기 위해 조수로 삼고 기초의학을 가르쳤다. 1894년 로제타와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평양 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위해 평양으로 임지를 옮길 때 로제타가 에스더에게 동행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저를 위해 문을 열어주시는 어느 곳이든지 저는 가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평양의 문을 열어주시면 저는 가겠습니다. 저는 몸과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제 몸과 제 마음과 제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비록 사람들이 저를 죽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조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제 삶을 바치겠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18세의 박에스더는 이미 주를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로제타의 제의를 받은 에스더와 박여선은 1894년 4월 홀 박사 내외와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이들은 제물포의 존스 댁에 2주를 머물고 5월 4일 제물포에스 평양으로 가는 증기선을 탔다. 이들의 평양선교를 순탄하지 않았다. 5월 10일 아침 윌리엄 제임스 홀의 조사 김창식과 마펫의 조사 한석진이 감옥에 갇혔고, 다른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았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로제타가 1897년 남편의 전기 <홀 박사의 생애>에서 증언한 것처럼 그들은 로제타와 남편 윌리엄 홀의 선교사역을 열심을 다해 도왔다. “박여선과 에스더는 평양에서 신실한 조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그들은 평양의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투옥에 처해지던 3일 동안의 극심한 박해 동안에 상당히 용감했다. 어느 한 날 박여선은 그의 상투가 잡힌 채 구타를 당하고 매질을 당한 후 투옥에 처해지는 명을 받았다. 다행히 주한 미국공사의 도움으로 김창식과 한석진이 풀려났고, 홀이 박여선을 구해줘 에스더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후에 박해가 그치고 로제타가 여성들과 이 도시의 10만 명의 어린이들을 위한 첫 기독교 사역을 시작했을 때 로제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로제타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을 자신의 조력자로, 학생으로 두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감사했다.
에스더는 기회가 주어지면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 기회는 우연치 않게 다가왔다. 로제타의 남편 홀 박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로제타가 선교회의 허락을 받고 1894년 12월 10일 본국으로 귀국할 때 에스더 부부를 동행시킨 것이다. 에스더가 먼저 로제타에게 그녀와 함께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로제타는 그녀를 동행시키는 것이 여행이나 미국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허락했다. 에스더에게 장차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한국에 선교사로 돌아오고 싶다는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박여선은 아내 에스더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것이 싫어 자신도 함께 미국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에스더 부부를 동반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차이나호에 승선할 때 로제타는 에스더의 신분을 일꾼(servant)으로 그리고 박여선은 요리사(cook)로 탑승객 명단에 등재했다.
III. 로제타의 여행동반자, 미국에서의 의학공부(1894-1900)
로제타와 에스더 부부는 약 26일의 항해 끝에 1895년 1월 6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고, 8일이 지난 14일에 부모가 살고 있는 로제타의 고향인 뉴욕 리버티(Liberty)에 도착했다.
에스더는 바로 의과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산수, 과학, 지리, 오르간 등의 서양 신교육을 받았지만 의학을 하기 전 이수해야 하는 선수과목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에스더는 로제타의 도움으로 1895년 2월 1일부터 로제타의 고향 리버티에 위치한 공립학교를 다녔고, 곧 학업에 좋은 진전이 있었다. 여선은 로제타의 아버지 농장에서 일을 하며 아내의 학비를 도왔다. 에스더와 여선은 1895년 7월 로제타가 고향 리버티를 떠나 뉴욕에서 이틀을 보낼 때 함께 동행했다. 로제타의 일기에 의하면 이 때 센트럴 파크에 가서 함께 멋진 마차 여행도 즐겼다.
로제타가 아이 둘을 양육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 의료 사역을 수행할 준비를 하는 동안 여선과 에스더는 에디스와 셔우드를 돌보며 그녀를 열심히 도와주었다. 이는 1895년 10월 18일 금요일 로제타의 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떠나 있는 동안 정말 착하게 지냈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선 삼촌이 아이들을 잘 돌봐 주었다. 엄마는 우리 에디스를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던 에스더 이모를 만났다. 에스더는 아주 잘 지낸다.”
1895년 9월 에스더는 뉴욕의 어린이 병원(Nursery and Child’s Hospital)에서 1년 정도 돈을 벌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간을 쪼개 왈버그 여사(Mrs. Walberg)의 지도 아래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개인교습 받으며 의대 진학을 준비했다. 1895년 10월 18일 로제타 셔우드 홀은 그녀의 육아일기에 에스더의 의대진학 준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엄마는 우리 에디스를 정성스럽게 돌보아주던 에스더 이모를 만났다. 에스더는 아주 잘 지낸다. 47명의 아기들이 입원해 있는 소아병동에서 수간호사를 보조하고 있었는데 일을 아주 잘해내고 있었다. 또한 라틴어, 수학, 물리학 개인 교습을 받고 있었는데 라틴어가 영어보다 쉽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년에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졸업하면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기 민족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해낼 거라 믿는다.”
로제타는 그날 일기에 이런 기록도 남겼다. “엄마는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더라도 에스더 이모와 여선 삼촌을 돕는 것으로 선교 사역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로제타가 한국에 돌아갈 마음을 가졌지만 만약의 경우 계획이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빠도 세상을 떠나 엄마 혼자 남아 있고 두 자녀를 키워야 하는 두 아이의 엄마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행은 부담스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매순간 선교적 책무를 의식하며 살았다는 사실이다. 로제타는 에스더가 의학공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측면에서 돕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일종의 선교사역이라고 생각했다. 에스더 역시 의대를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여선도 마찬가지였다. “박여선은 아주 근면하게 영어 공부를 감당하면서 동시에 그의 아내가 의학 공부를 준비하도록 돕기 위해 수입에서 저축을 했다.” 여선은 셔우드와 에디스를 돌보고 다림질도 하며 로제타를 도왔고 로제타는 에스더와 서로 언니 동생처럼 의지하며 가까이 지냈다. 셔우드와 에디스도 에스더를 이모로, 여선을 이모부로 생각하고 잘 따랐다. 로제타와 에스더 가정은 서로 큰 의지가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의 소천 1주기를 맞는 1895년 11월 에스더는 로제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위로했다.
“1년 전 11월 바로 이날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의 친한 친구이자 형제였던 그분이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천국 문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슬펐답니다. 어젯밤 멀리 떠나가신 다정했던 그분과 언니를 생각하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저는 언니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어요. 언니가 어린 두 아이들과 함께 얼마나 외로울지 생각하니 그 슬픔이 제게도 너무 큽니다. 제가 언니의 위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래요. 거룩하신 위로자가 언니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 또한 소중한 언니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고 싶어요.”
이 편지는 로제타 자신이 일기에 기록한 대로 남편의 소천 1주기를 맞아 “아기 에디스의 이모로부터 받은 참으로 친절하고 사려 깊은 편지”였다. 아이들은 여선을 ‘다’라고 불렀다.
윌리엄 제임스 홀의 소천 1주기를 맞던 1895년 11월 10일 <필라델피아 인과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에는 “에스더 박: 학생으로 미국을 방문한 첫 번째 한국 여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녀의 미션스쿨 교육, 결혼, 미국 방문, 그리고 의학공부에 대한 비전이 그대로 담겨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젊은 한국 여인, 에스더 김은 그녀의 나라의 불신자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허용될 수 있도록 하려는 이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고, 비록 그들은 결혼식 날까지 서로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젊은 부부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에스더-그녀의 기독교 이름-는 통역과 교사로 그녀의 백성들 가운데 선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15[14]살에 그녀가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의 통역으로 고용된 것은 그녀에게는 좋은 행운이었다. 로제타는 그 탁월한 젊은 여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녀에게 약 조제를 가르쳤고 서울에 있는 한국 선교사 병원의 간호사로 고용하였다. 장차 의사 개업을 희망하는 에스더 박-결혼 후 그녀의 이름-은 미국에 오기로 결심한 첫 한국여성이었다. 한국정부로부터 적절한 허가를 획득한 후 에스더 박과 그녀의 남편은 로제타 홀 박사를 동반하고 이 나라에 왔다. 홀 박사는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이들의 보호자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에스더 박은 내년에 의과대학에 진학할 목적을 가지고 지금 준비 중에 있다. 아주 약간의 액센트가 있지만 그녀는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녀는 완벽한 신체를 지니고 있고, 환자에 대해 진심어린 친절과 부드러운 자세를 지니고 있어 천성적으로 의사활동에 잘 어울린다. 비록 그녀가 19살의 나이지만 그녀는 몇 년에 걸쳐 책에서 배울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기사는 당시 에스더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분명한 한 가지는 당시 에스더는 장차 의사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1896년 가을학기에 의과대학에 입학할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대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1896년 2월 21일 박에스더는 딸을 출산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로제타 홀은 1896년 8월 26일 서재필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에스더가 현재 의과대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에스더가 의학을 마치고 돌아가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사실과 의과대학진학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격려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는 독립신문 영자지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10월 22일자에 소개되었다.
에스더가 의학공부를 하는 동안 여선은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보통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선과 에스더는 미국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erry M. Cutler, 1865-1948)가 보내준 <독립신문>을 읽고 감동을 받아 아내에게 많은 돈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 많이 보낼 수 없다고 밝히고 자신의 수입 중에서 독립문 공원 조성 보조금 금화 3원을 보냈다. 1896년 10월 24일 <독립신문>은 이를 매우 의미 깊게 여기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죠션 박여션이란 사람이 자긔 안해와 함끠 년젼에 미국 드러 가셔 버리 하야 자긔 안해를 의학교에 드려 보내여 공부하는 부비를 당하여 주면서 공부를 식히더니 향일에 죠션 와셔 잇난 미국 의원 부인 커덜네씨가 독립신문 한쟝을 박여션의게 보내엿거날 박여션이가 닑어 보다가 죠션자쥬 하난 독립문을 모회관 그젼 연쥬문터에다 셰운단 말을 보매 죠션이 독립된 거슬 해빗 갓치 드러내난 줄을 알고 무슈히 경츅 하며 자긔 안해와 즐거옴을 이기지 못하야 독립문 보죠금을 금젼으로 삼원을 보내엿난대 은젼으로 논지컨대 오원 팔십 오젼 가량이나 되니 이런 사람은 외국에 간제 얼마가 못되야 발셔 자긔 나라 사랑하난 마음이 도져히 생겟더라.
1896년 11월 30일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 1호에는 독립협회 보조금 수입 인명이 실렸고, “美國 留 朝鮮人 五元五十戔”이라고 기록되었다. 선교사가 독립신문을 보내준 것이나, 그 신문을 받고 감동을 받고 조국의 독립을 깊이 환영하고 정말 없는 가운데서 독립문공원 조성비를 지원해준 박여선과 박에스더 부부의 나라 사랑은 참 대단했다고 생각된다.
1897년 5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 로제타는 에스더 부부를 동반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에스더에게 의사가 되는 비전을 접고 자신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편지를 통해 제안했다. 여선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했다. 사실, 여선의 경우 로제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1894년 12월 10일 미국으로 올 때 이미 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여선은 로제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절하고 얼마 후 로제타의 집을 떠났다. “[1897년] 8월 말에 에디스가 ‘나의 다’라고 부르는 여선이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하면서 우리 집을 떠났다. 에디스는 여선을 많이 그리워한다. 처음에는 여선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애드게이트(Adgate) 부인 댁으로 갔기 때문에 자주 그를 보러 갔으므로 별로 말이 없었는데 ... 분명히 여선도 아기 에디스를 이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보고 싶어할 것이다. 여선은 에디스와 셔우드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 같다.”
1897년 중반에 접어들어 로제타는 여선으로 인해 한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로제타는 두 번째 내한하면서 기록한 일기에서 여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엄마가 없는 동안 할머니와 ‘다’(여선)가 셔우드와 에디스를 돌봐주었다. 비록 ‘다’가 예전만큼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사랑하는 할머니를 걱정시켰지만 말이다. 그는 엄마가 미국에 데려 올 때 한 약속과 달리 우리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엄마는 여선에게 가능한 빨리 일할 곳을 구하라고 했다. 엄마는 이제 여선이 필요치 않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행여 그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하여 그냥 그를 데리고 있었을 뿐이다. 여선이 달리 결정하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엄마는 뉴욕에서 그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고, 5월에 그곳에서 여선에게 구해 주었던 일을 계속하게 했을 것이다. 여선은 엄마에게 다시 도시에서 할 일을 구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여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요리나 빨래, 다림질은 하지 않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서 엄마는 그에게 어떤 일도 구해줄 수 없었다. 여름 내내 엄마는 여선을 거두느라 일주일에 4불을 지불했으나 그 비용만큼 그는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근심을 끼쳤으며 걱정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후 여선은 이를 뉘우치고 더 잘하기 시작했으며 엄마가 찾아주는 일이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샌드포드(A. D. Sandford) 목사 댁에 좋은 일자리를 구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로제타는 에스더에게 의사가 되는 꿈을 이제 접고 한국으로 자신과 같이 돌아가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이 때 에스더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만약 제가 지금 이것을 포기한다면 또 다른 기회가 저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남편도 그 어떤 것보다 제가 의사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가 없다면 그 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이 때 에스더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The 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해 1년의 학업을 마치고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의대 진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에스더는 1896년 10월 1일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지원하여 합격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서양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첫 한국인 여성이 되었다. 이 대학은 1882년 설립되어 1883년 첫 입학생으로 개교한 의과대학으로 에스더가 입학할 당시 14년의 역사를 가진 비교적 신흥의과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뜻이 맞는 의사들이 의기투합되어 여자의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후 1910년 폐교되기까지 거의 30년 동안 수많은 여자의사들을 배출하였다. 비록 역사가 깊지 않은 신흥의대였지만 상당한 의료시설을 갖춘 수준 높은 의학훈련 학교였고, 그동안 배출한 졸업생 모두가 메릴랜드 주 면허시험에 합격하였다.
의대에 입학하여 약 4개월 반이 지난 뒤 1897년 3월 15일 그녀의 사랑하는 딸이 뉴욕아동병원에서 약 열흘 동안 폐렴을 심하게 앓다 세상을 떠났다. 결혼 2년 9개월, 그녀 나이 20살에 낳은 사랑하는 딸이 불과 한 돌이 막 지난 뒤 죽은 것이다. 그녀에게는 보통 충격이 아니었지만 의사에 되어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마음에 변화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의학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의사로의 길을 준비하는 동안 미국 북감리회 피츠버그 지회의 여성해외선교부가 박에스더의 학비를 지원하였다. 1896년 입학한 에스더는 이 대학의 4년의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의사 시험에 합격해야 메릴랜드 주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녀는 어려운 의과대학의 과정을 매우 훌륭하게 이수해 냈다. 그 대학 교수회 서기 코들 박사(Dr. Cordell)는 그녀의 지성과 근면성을 높이 평가했다. 에스더는 입학 첫해의 의학과정을 잘 이수했고, 로제타는 1년의 의학과정을 마친 에스더가 남은 3년의 의학과정도 성공적으로 마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1897년 남편의 전기에 에스더 박에 대해 거의 10페이지를 할애하여 소상하게 그녀의 학업 결혼 미국 방문과 의과대학 입학의 과정을 소개한 다음 독자들에게 “에스더 박의 학비를 지원해주기를 갈망하는 어떤 독자가 있다면 볼티모어 607 톰슨 가에 거주하는 스티븐스 여사(Mrs. E. B. Stevens)에게 기금을 보내주십시오.”라며 에스더의 학비 지원을 호소했다.
1897년 10월 로제타 홀이 한국으로 떠난 뒤 뉴욕에 머물던 박여선은 아내가 유학하고 있는 볼티모어의 한 식당으로 직장을 옮겨 그곳에서 돈을 벌면서 아내의 학비를 지원했다. 부부의 입장에서 볼 때 같은 도시에 산다는 것은 서로가 격려가 되고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스더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았다. 당시 미국의 감리교회가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을 비롯한 많은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감리교는 한국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많은 미국 감리교회들이 에스더를 초청해 교회의 여성해외선교부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그녀의 신앙간증을 듣고 싶어했다. 이것은 에스더에게 한국과 한국선교를 알릴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그녀가 의과대학 2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1897년 2월 1일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에는 “한국의 에스더 박 여사”라는 아주 짧은 기사가 실렸다.
“그녀의 조국에서 선교사역을 할 목적을 가지고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에스더 박이 롬바드와 그린 가에 위치한 갈보리 감리교회에서 어제 오후 강연을 했다. 에스더 박은 그녀의 나라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했는데 시청자들에게 그곳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필요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볼티모어 그리스도인들이 에스더의 강연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은 것이다. 에스더가 이 대학에서 4년의 과정 중 3년을 마칠 즈음 에스더의 대학재학 동안 에스더 박에 대한 특별 책임을 맡고 있던 북감리교여선교회 볼티모어 통신 담당 서기 스티븐슨 여사는 1899년 4월 27일 Gospel in All Lands 편집장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에스더 박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의 3학년 과정을 막 끝내는 중에 있습니다. 그녀는 졸업하기 전까지 1년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 대학과 관련이 있는 병원에 있습니다. 그는 결핵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졸업장을 받으면 아마 가능한 속히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만족스런 학생이었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며 그녀가 한국에서 우리 선교에 상당히 값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녀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기부금에 의해 후원을 받아 왔습니다. 그녀의 남편의 질병과 그와 그녀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그녀를 지탱해주고 있으며 그녀는 기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백성들 가운데 선교사역을 위해 곧 더 잘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위한 기부는 볼티모어 탐슨 애브뉴 604, E. B. Stevens 여사에게 보내실 수 있습니다.”
위의 스티븐슨 여사의 편지는 당시 에스더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녀가 성공적으로 의과대학 3학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마지막 1년이 남았다는 사실, 폐결핵에 걸린 남편이 그녀가 다니고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 그녀가 재정을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선교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의학공부를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선교’ 곧 북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인들 가운데 의료 선교사역을 감당할 것을 기대한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미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필라델피아 대회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면 그녀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학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899년 10월 24일 미국여자의과대학 의학회가 모였을 때 에스더는 회계에 선출되었다. 이미 그녀는 한명의 여자 의대생을 넘어 미국의 여자의과대학에서 미국인의학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학업을 수행한 것이다. 이런 고무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의학공부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남편 여선이 폐결핵으로 투병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낮에는 학업을 감당하랴, 밤에는 남편을 간호하랴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의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에스더는 4년 과정을 다 마치고 의료실습과 그 어려운 졸업시험도 통과했다. 약 7년이 지난 1907년 10월 에스더의 스승 루이스 박사는 에스더가 자신이 잘 기억하고 있는 학생 중의 한명이라며 에스더의 의과대학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에스더 박 박사는 지금 극동에 있는데 매우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그녀는 매우 다양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박은 의학과정을 너무도 슬프게 끝맺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말시험이 막 시작하려고 할 때에 그녀가 낮에는 강의를 듣고 실험을 하고 밤에는 그녀가 간호를 해오던 그녀의 남편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당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훌륭히 기말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박여선은 1900년 4월 28일 볼티모어에서 세상을 떠나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외곽에 있는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Yousan Chairu Pak, 1868년 9월 21일 출생, 1900년 4월 28일 사망’이라 기록되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남편 박여선은 에스더보다 8살 위였다.
어려운 의학공부와 남편의 병간호를 병행하는 그 힘든 환경과 싸우면서도 에스더는 매 학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상급학년 진급시험도 무사히 통과했으며, 4년 과정을 다 마치고 메릴랜드 주 의사시험에도 합격했다. 에스더는 1900년 5월 14일 졸업과 함께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과 함께 한국인 최초의 여자의사,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과대학을 마친 여성, 한국인 최초의 여자의학박사라는 영예를 얻었다.
1900년 5월 14일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의 졸업식을 소개하면서 ‘한 한국 여자의사’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나라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고 밝혔다.
“에스더 박 박사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서 4년을 보내면서 전 과정을 이수했다.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그녀의 모든 분야에서 성공적이었다. 박 박사의 남편은 함께 이 나라에 왔고 둘은 자신들의 백성들 가운데 선교사역을 수행할 생각을 가지고 함께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남편 박씨의 건강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의학과정을 끝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박 박사는 그들이 함께 사역을 하려고 계획했던 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홀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박씨와 박여사의 진행과정에서 한국공사가 많은 관심을 가졌다. 와싱톤의 한국 영사관 중 두 명이 졸업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박 여사와 대표단 위원들이 졸업식에 앞서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의 교수회 서기 요셉 스미스(Joseph T. Smith)가 1010 메디슨 가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만찬을 준비해 대표단을 환대할 예정이다. 그 외 만찬에 초대된 다른 초청객들은 교수회 의장 콘 박사(Dr. Claribel C. Conn), 존 티모디 스톤(John Timothy Stone)과 밴메터 박사(Dr. J. B. VanMeter)이다.”
지역 신문이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 졸업식 날 졸업식을 예고하면서 박 에스더를 집중 부각시킨 것이다. 위 글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남편 박여선이 의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기록, 와싱톤에서 한국공사관에서 2명이 졸업식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졸업식에 앞서 만찬을 갖고 에스더의 졸업을 특별히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학교가 그녀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학교의 영예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여선이 의학을 공부하였다는 부분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할 듯하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사실과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다.
1900년 8월 <가스플 올랜드>에 보도된 대로 1900년에 에스더 박은 앨리스 하몬드 양과 함께 공식적으로 북감리교 여자해외선교회로부터 한국파송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IV. 귀국과 사랑과 헌신의 섬김(1900-1910)
1900년 5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에스더는 그해 여름 공식적으로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900년 10월 귀국했다. 미국 공립학교와 의과대학을 다 마치고 한국인 최초의 여자의사가 되어 귀국한 것이다. 그녀가 한국을 떠난지 정확히 6년만이었다. 오늘날 평가해도 그녀의 귀국은 금의환양이다. 1900년 12월 <신학월보>가 “부인의 학사 박사 환국하심”이라며 그녀의 귀국을 대서특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륙년 젼에 박여선씨의 부인이 리화학당에셔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간 부인의학사 홀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셧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셔 공부하여 의학사의 졸업장을 밧고 지난 십월에 대한에 환국을 하엿나니라. 공부가 여러 해 되엿는데, 그동안 박여션씨는 셰샹을 떠나시고 그 부인이 혼자 계시매 셥셥하온 마음을 엇지 다 위로하리오 마는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시매 우리 대한에 무식한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어 예수 그리스도교에 나오게 하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 같은 부인이 처음 있음을 치하하노라. 또 부인끠셔 홀의학사 부인을 모시고 평양으로 가셔셔 사람의 육신 병을 곳쳐주실 때에 육신병만 곳칠뿐아니라 령혼병까지 곳쳐주시와 영생토록 무병케 곳쳐주시고 하나님 압희 큰 샹밧기를 우리가 또한 바라노라.”
<신학월보>는 에스더 박 박사에게 극존칭을 사용하면서 그녀가 서양의학수업을 다 마치고 서양의사가 되어 귀국한 것을 치하하고 그녀의 앞으로의 사역을 기대하며 자랑스럽게 기록한 것이다.
당시 한국 감리회선교보고서 기록을 살펴보면 박에스더 박사는 1901년 북감리회연례보고서에는 없고 1900-1901년 32차 북감리교여자해외선교회의 연례보고서와 1902년 이후 북감리회연례보고서부터 여성해외선교회 파송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었다. 필라델피아 지회가 그녀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고, 1902년 당시 주소는 한국 평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16명의 서양 여자 선교사 명단에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이름이 올라 있다. 그녀의 공식 이름은 ‘에스더 박 의사’ 혹은 닥터 에스더 박(Esther K. Pak, M.D.)이었다.
에스더는 1900년 10월 귀국해 한국인 최초 미국 감리회여성해외선교회 임명 의료선교사로 정동 보구여관에서 안식년을 맞아 떠난 커틀러 박사의 후임으로 배속받았다. 그러나 1900년 10월 26일부터 1901년 4월 29일까지 그녀의 첫 6개월 의료사역은 평양에서 로제타와 함께 수행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그녀의 첫 의료선교보고를 제출했다.
“이들 숫자 가운데는 초신자들도 있고 몇 명은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했습니다. 나는 의료 사역 외에 복음전도사역을 도왔습니다. 나는 가까운 마을을 한 차례 잠깐 방문해서 복음에 대해 더 배우기를 갈망하는 여러 복음의 청취자들을 발견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나는 왜성을 방문해서 소수의 여인들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미약한 종을 통해서 그분의 소중한 말씀을 받기위해 함께 모인 여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매주일 나는 몇 명의 부녀들과 여자들을 가르치고 일주일에 두 차례씩 나는 학교 여학생들에게 생리학과 위생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그들의 가정에 대단히 필요합니다. 평양의 성서부인들을 위한 훈련수업이 내가 도착한 이후 두 번 모였으며 나는 기꺼이 이 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해에 나는 나의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긴 보고서를 제출하기를 희망합니다.”
에스더는 겸손하게 많은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 것처럼 보고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로제타 셔우드 홀과 의료사역과 전도사역을 함께하며 많은 결실을 맺었다. 한국에 입국해 10월부터 4월까지 첫 6개월 동안 에스더는 새로운 환자 730명, 재진 환자 562명, 그리고 왕진 환자 68명 등 총 1,3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1901년 5월 로제타 셔우드 홀은 “박 에스더 박사가 도착했으며 그녀는 우리의 여성사역 전 분야에서 우리에게 귀중한 도움을 주고 있다”고 그녀의 의료-전도사역 보고서에서 밝혔다. 로제타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에서 광혜여원 환자 치료와 환자 왕진 치료가 10개월 동안 2,411회나 있었는데 박에스더가 이들 중 반 이상을 감당했다. 에스더는 노블 여사, 로제타 셔우드 홀과 함께 시골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평양에서 학교와 전도사역을 맡고 있는 북감리교선교사 Mary Harris Follwell의 사역도 도와주었다.
1901년부터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날 때가 박 에스더의 의료사역은 평양 광혜여원과 서울 보구여관 두 곳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처음 귀국해 1900년 10월 26일부터 로제타 셔우드 홀이 1901년 6월 안식년을 떠날 때까지 평양에서 동역하다 로제타가 안식년을 떠난 뒤 안식년을 떠난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를 대신하여 서울 보구여관으로 옮겨 1903년 4월까지 사역했다. 1903년 3월 20일 메리 커틀러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왔고 로제타 셔우드 홀 역시 같은 시간에 귀국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와 함께 평양에서 동역하기 위해 1903년 5월 평양으로 옮겨 1904년 3월까지 로제타와 함께 여성병원 의료사역과 황해도 전도사역을 감당하였고, 1904년 4월부터 1905년 6월까지는 여성병원 의료사역을 맡으면서 신계구역 전도사역도 동시에 감당했다. 1905년 7월부터 10월까지 건강으로 요양을 한 뒤 다시 복귀해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양에서 로제타 셔우드와 의료사역을 감당하면서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고, 평양지역의 복음전도사역을 감당했다. 이 10년 동안의 박에스더의 의료사역은 크게 1905년 7월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1905년 7월 이전까지 박에스더는 초인적으로 의료사역을 감당하면서 복음도 열심히 전했고 로제타를 도와 맹아 농아학교도 지원하는 등 1인 2역, 3역을 감당하였다. 결핵에 걸린 후 그녀는 이전처럼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할 수 없었고, 그녀의 의료활동과 전도사역은 제한적이었다. 이 기간 에스더의 의료활동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사료의 제한으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여러 보고서와 기록들을 종합하여 비교적 충실하게 박에스더의 활동을 고찰하려고 한다.
1. 1901-1903년 보구여관에서 박에스더 의료사역
1901-1902년 한 해 동안 박 에스더는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사역을 감당했다. “그녀는 1년 내내 8월에 2주간을 제외하고는 매주일 6일 동안 환자들을 받았다. 1년 동안 그녀는 1,198명의 초진환자를 진료했고, 2,002명의 재진환자를 진료했다. 128명의 한국인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가정을 방문했다. 이들 수자는 진료시간 외에 치료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그녀가 한 해 동안 진료한 환자 전체 수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3,328명이었다. 우리 보구여관에 오는 모든 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을 기회를 가졌다. 우리의 충성스런 전도부인 데라사는 그녀의 모범을 보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였다. 부인들 몇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간절히 갈망했다. 전도지와 책자들을 그녀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우리들은 상당히 많은 신앙 캘린다를 팔았다.”
에스더는 거의 모든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몇 명의 환자들은 한국인 재래의 의사들이 포기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녀를 찾아온 여성 환자들이었다. 발목을 삐어 재래 한국인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가 침을 놓았으나 잘못되어 그 결과 발목 전체를 잃고 말았다. 에스더는 환자들의 사례를 관찰하면서 잘못된 민간요법과 재래 한국인 의사들의 잘못된 진료로 인한 피해 사례들을 적지 않게 발견하고, 아주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몇몇의 경우는 보고서에 기록했다. 한 번은 한국인 의사가 포기한 젊은 폐결핵 말기 여환자의 요청을 받고 그녀 집에 도착하자 그 집에서는 그녀를 장례를 치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에스더가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의 맥박은 아직 뛰고 있었다. 에스더는 “서둘러 원상회복제를 투여할 준비를 하다 깜짝 놀랍게도 그녀의 입이 생쌀로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영혼이 영의 나라로 여행하는 동안 사용하라고 사람들이 그녀 입에다 생쌀을 가득 채워 넣은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자 그들이 이 쌀을 아주 주의 깊게 보존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놀랐다.” 에스더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그것이 말라리아를 고치는 데 특효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환자는 일주일을 더 살았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무지를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에스더는 멀리 떨어진 시골의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그들을 돌볼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녀는 멀리 떨어진 환자들을 입원시켜 그들의 육체와 영혼의 고통에서 구원해 줄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녀가 볼 때 진료소에 와서 치료를 받는 환자들보다 병원에서 입원해 안정된 가운데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을 더 잘 치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에스더는 필요한 경우 언스버거(Ernsberger) 박사와 아비슨(Avison) 박사에게 자문을 구하며 의료 사역을 감당했다. 페인(Josephine O. Paine)의 보고서, 프레이(Lulu E. Frey)의 이화학당 보고서, 그리고 언스버거(Emma Ernsberger) 박사의 “발드윈 진료소와 동대문 예배당” 보고서에도 에스더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에스더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헌신적으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조국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보구여관에 찾아오는 한국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01-1902년 사이에 69명이 새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에스더 박 박사의 보구여관, 이화학당, 그리고 학교에서의 에스더 박 박사의 영향과” 성서부인들과 다른 교회 방문자들을 통한 영향의 결과였다.
보구여관에서 박에스더의 2년차 의료사역은 그녀의 연례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가 보낸 미국북장로교 여자해외선교회의 34차 연례보고서(1902-1903)에 의하면 박 에스더는 의료사역, 복음전도사역,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 자신을 필요로 하는 다른 동료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등 1인 3역, 4역을 감당하면서 정말 바쁘게 사역을 감당했다. 1903년 5월 그녀는 제 5차 북감리교 여성선교사 대회의 자신의 선교 보고서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또 한 해가 지나갔습니다! 한 해가 와서는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나는 놀랍니다.”
“보구여관 의료사역은 내가 휴식을 가지는 7월 한 달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7월 한 달 동안에도 환자들은 매일 나의 집에 와서 내게 그들에게 약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그들을 매정하게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나는 130회 이상 방진 요청을 받았고 보구여관에서 1,230명의 새 환자들과 2,017명의 재진 환자들을 진료해 전체 3,377명을 진료했습니다. 이 수자는 학교 여학생들의 진료도 포함한 것입니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진료 시간 외에 진료를 받았으며 몇몇의 응급환자들은 주일에도 진료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몇 번인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실한 전도부인 테레사와 나의 두 명의 조사들 베시(Bessie)와 그레이스가 수많은 복잡한 의료 사역 중에도 내 곁에서 함께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충성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한 해 동안 에스더가 얼마나 초인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는가는 수치가 말해준다. 그녀가 7월 한 달간은 휴식을 가졌지만 환자들이 자기 집에 찾아오는 바람에 제대로의 휴식을 갖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에스더는 확실히 한국에 돌아와 사명에 산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6일간 온 심혈을 기울여 의료사역을 감당했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더 마음 아프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무지와 위생 무시로 발생한 생명의 위협이었다. 1902년 그 당시 코레라가 한국에 대 유행하였고, 그로인한 피해도 매우 심각했다. 에스더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보고했다.
“지난 한 해는 코레라 유행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시련의 한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 문 입구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았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악령이 자신들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 줄 것이라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코레라는 쥐병이라고 알려졌는데 고양이가 쥐에 대한 천적이고 더 강했기 때문에 고양이 그림이 그 병을 멀리하도록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죽기를 두려워한 것은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장차 고대하는 밝은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의 그렇게 많은 이들이 짧은 시간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들 중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일말의 희망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자니 내 마음이 무겁게 짓눌려 옵니다. 그러나 그 병에 걸린 그리스도인들 중 얼마가 자신들이 살아서만 아니라 죽어서도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에서 죽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도 보기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요! 코레라 유행은 제가 처음 경험한 것이라 나는 약간 긴장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시고 제게 건강과 힘을 주셔서 대표약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도왔습니다. 테레사와 저는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성경말씀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코레라 유행이 지나가자 우리 모두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욱 더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일상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902-1903년 한 해 동안 코레라가 만연된 상황에서도 에스더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의사로서의 책무와 복음전도자로서의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것이다. 그녀는 코레라 유행 속에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위로하며 복음을 증거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이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오자 에스더는 그녀와 함께 동역하기 위해 다시 평양으로 소속을 옮기고 1903년 봄부터 평양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1903년 보고서에는 에스더 박의 소속이 “황해도 지역 진료와 복음전도사역”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에스더가 평양에서 의료사역을 감당하면서 황해도 지역의 복음전도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그것은 에스더가 1903년 봄부터 평양 기홀병원에서 본격적으로 로제타와 함께 계속 의료와 복음전도 사역을 감당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에스더는 로제타에게는 여동생이자 친구이자 자신과 같이 남편을 잃어버린 같은 미망인으로 동역하면서 서로 많은 의지가 되었다. 그 당시 에스더가 로제타에게 얼마나 큰 힘과 도움이 되었는가는 로제타 셔우드의 일기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시골 지방의 여성들에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도 시골 여성들을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에스더는 그런 사업은 지체하지 말고 당장 시작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셔우드와 병원, 어린이 병동까지 그녀에게 맡기고 요리사와 수잔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에스더는 내가 없는 동안 치료소의 일을 전담했으며 어린이 병동의 두 환자들을 돌보았고 또 왕진까지 맡아하느라 정말로 바쁘고도 보람된 날을 지냈었다. 내가 없어도 병원의 모든 일이 이렇게 훌륭하게 처리된 것은 진정으로 내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다. 내가 보고서, 건축계획, 또는 다른 사무일로 바빠져도 에스더가 병원 일을 계속 전담해 줄 수 있다. 나는 맹인을 위한 사업을 더 진전시키고 싶다. 우리 학교에는 맹인 소녀들이 4명이나 있다. 그러니 학생과 선생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한없이 많다.”
로제타는 그 힘든 과정에서도 에스더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병원 사역만 아니라 장애인 사역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로제타와 함께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의 각 촌락을 순회하며 가난한 농촌 마을의 환자들을 희생적으로 치료하는 일을 감당했다. 아들 셔우드 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에스더의 귀환과 어머니 로제타와 동역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에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의료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일한지 10개월 동안에 그녀는 3천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 우리는 그녀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녀는 조선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박여선은 에스더가 의학교를 다니는 동안 볼티모어에 있는 식당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아내를 도왔다. 그러다가 폐결핵에 걸렸다. 에스더의 따뜻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볼티모여자의과대학(현재 존스 홉킨스 대학) 졸업반 때 박여선은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나는 에스더를 무척 좋아한다. 그녀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우리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감미롭고도 선율 있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저녁에는 내게 소설이나 시를 낭송해주곤 했다.”
로제타의 일기의 기록과 아들 셔우드 홀의 전기에서 우리는 에스더가 얼마나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에게 큰 힘과 위안과 격려가 되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로제타가 남편, 아빠, 딸, 엄마마저 잃고 힘든 가운데서 이 땅에 남아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더와 같은 신실한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셔우드가 증언하는 대로 “그녀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우리와 함께 살았다.”
에스더는 로제타와 함께 1903-1904년 사이에 놀랄 정도의 의료-복음전도 사역의 결실을 맺었다. 둘은 광혜여원에서 한 해 동안에 4,857명을 치료했는데 그중 2,694명이 초진환자이고 2,163명이 재진환자였다. 사실 이들 환장 중 절대 다수는 에스더가 담당한 의료사역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03년 그녀는 성경학교에서 위생을 강의하고, 1903년 11월 순회선교를 처음 시작했다. 1903-1904년 그녀는 광혜여원에서 로제타와 의료사역을 하는 동안에 황해도 700리에 해당하는 선교구의 복음전도사역도 동시에 착수한 것이다. 그녀의 순회여행은 단순한 복음전도만 아니라 의료사역이 병행된 복음전도사역이다. 미국 북감리교해외여선교회의 입장은 의료사역을 통한 한국인들의 영혼구원은 중요한 한국선교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릴리아스도 수행한 것이고, 남자의료선교사들도 수행한 선교사역이었다. 처음 평양을 개척할 때 윌리엄 제임스 홀도 마찬가지다. 사실 순회의료사역은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 사역이다. 당시 여성이 순회여행을 하는 것이 보통 힘든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04년 러일전쟁의 전운이 평양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광혜여원에서 로제타와 함께 혼신을 다해 의료사역을 감당하고 순회전도를 하고 위생강의를 하고 평양농아맹아학교를 지원하는 등 살인적인 의료-전도사역을 감당했다. 이 기간 북감리교연례보고서에는 박 에스더가 1900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 임명된 의료선교사로 여성해외선교회 파송 명단에 올라있다. 당시 주소지는 한국 평양으로 등재되었다. 1904-1905 감리교 제 36차 여자해외선교회 보고서에는 당시 에스더 박이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에델 에스티(Ethel M. Estey), 헨리타 로빈스(Henrietta P. Robbins)와 함께 평양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한국에 파송된 정식 의료 선교사로 당시 쟁쟁한 서양의 여자 의료선교들과 나란히 북남리교선교사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당시 여자의 신분으로 평양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로제타가 보고한 대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해 신변의 안전이 위협을 받자 로제타는 잠시 에스더 박을 서울에 머물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에스더는 로제타 홀과 함께 의사로 봉사할 뿐만 아니라 평양맹아학교와 농아학교 그리고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복음전도운동에도 동참하고, 여자성경학교에서 성경과 위생학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
건강에 이상이 찾아왔는데도 그녀는 진료를 계속해야 했다. 그녀는 혼신을 다한 계속된 진료로 인해 체력이 급속하게 약화되어 급기야 1905년 7월 이후 그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해 9월 그녀는 건강회복을 위해 중국 제푸(Chefoo, 오늘날 옌타이[烟臺])로 요양을 떠났다. 1905년 10월 4일 제푸에서 그녀가 루이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그녀의 근황이 소상하게 기록되었다. 여기 전문을 소개한다.
“Chefoo, China, October 4, 1905.
사랑하는 나의 루이스 박사님:
7월 1일 보낸 당신의 편지가 9월에 제게 도착했습니다. 도중에 너무 지연되어 졸업 이후 저의 의료사역에 대한 어떤 내용에 관하여 제 때에 당신에게 쓸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편지를 받은 후 곧 저는 저의 사역에서 벗어나 건강문제로 요양하기 위해 해안으로 가야 했습니다. 저의 건강은 거의 여름 내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열과 급성 흉막염의 모든 증상들로 인해 할 수 없이 침대에 누워야 할 때까지 저의 의료 의무를 계속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폐를 약하게 만들었고, 폐결핵의 분명한 징후와 두드러진 쇠약, 심장의 합병증을 유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05년 7월초이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푸는 정말 아름다운 해안가, 여름 휴양지입니다. 저는 이곳에 온 후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마도 바다 공기가 도움이 된 듯합니다. 체중도 약간 증가했습니다. 제가 그런 무서운 질병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니 매우 슬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게 잘해주셨습니다. 제 건강이 다시 회복될 것 같습니다.
당신의 편지가 늦어져서 저의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 때는 여기 제가 한 일에 대한 설명이 당신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게끔 될 것 같아 대단히 유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잉골드 박사와 맥밀란 박사로부터 친절한 편지를 받았기를 소망합니다. 맥밀란 박사는 원산에 살고 있고 잉골드 박사(테이테 여사)는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잉골드 박사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테이테 씨와 결혼했습니다. 당신에게 소식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 사랑하는 옛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W.M.C.)과 모든 친절한 교수들에 대한 실제적 향수가 제게 일어났습니다. 제가 더 이상 받지 못한 W.M.C.의 카탈로그를 어떻게나 즐겼는지 모릅니다. 저는 종종 학교를 들려 강의 중 얼마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가끔 일에 싫증이 나고 종종 친절한 선생님들 몇명과 환담을 나누고 저의 복잡한 몇몇 케이스들에 관하여 상의를 드리기를 간절히 갈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의 기회는 결코 제 몫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한국에서의 의료사역은 결코 게으를 수 없는 사역입니다. 여기 우리 의사들은 아주 어려운 환경들 속에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두 사람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너무 분주하게 임직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입원환자 외에도 매일 종합진료(a full clinic)를 수행했습니다. 저는 진료소에 한 명의 조수를 두고 있고 우리는 한 명의 바깥 사람 말고 병원에 두 명의 조력자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병원의 역량은 당신의 대학 병원보다 훨씬 규모가 큽니다. 우리가 수술할 때 우리를 도울 수 있는 훈련 받은 간호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나는 힘을 다해 최대한으로 준비를 하고 우리 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수술을 집도합니다. 보통 좋은 수술 결과를 얻습니다. 우리 병원에 모든 현대 의료도구와 훈련받은 간호사가 없어 우리가 그 일을 대신 수행합니다. 홀 박사는 수술 대부분을 집도하고 저는 그녀를 도와줍니다. 아직은 지금까지 제가 혼자 수술을 집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몇 차례 매우 성공적인 혈관 누공 수술(vesicovaginal fistula operations)을 수행했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6,7년 동안 그 병을 앓았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수술은 우리가 희망했던 것만큼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만 열 번째 수술로 그녀를 완전히 치료했습니다. 또 하나의 수술 사례는 여러 해 동안 외상성 ‘방광-질의 누공’ 질환을 앓고 있는 나이든 여인의 경우인데, 그녀의 방광은 전체가 병들고, 찢어지고, 수축되었는데 단 한 번의 수술로 완전히 치료받고 퇴원했습니다. 68세의 이 늙은 여인은 여러 해 동안 자궁탈출이 되었었습니다. 어떤 돌팔이 의사가 그녀에게 그것을 불태우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결과 방광벽과 그 주변 조직이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불태우는 것은 그런 병에 대한 한국인 의사들의 가장 흔한 처방 방식인데 우리는 그로 인한 후속 결과를 치료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치료 방식으로 인한 여러 폐쇄 사례뿐만 아니라 누공 사례를 갖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마약에 관한 아주 기묘한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태반 유지의 경우 생선 비늘이 그 환자의 밑창에 묶여 있었고, 피마자 초(caster oil plant)가 그녀의 머리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방진을 했을 때 사람들이 아이에게 경기를 치료하기 위해 빈대를 기름에 요리해 먹인 사례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무지의 잘못된 사상들과 맞서 사역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경을 매우 예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환자를 굶긴다(다이어트)는 말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장출혈이 심한데도 만약 아이가 원하면 엄마는 날 호두, 옥수수, 사탕, 그리고 아이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줍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 가운데서 의료사역을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 같은 많은 사례들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만 저의 편지가 꽤 길어져 이제 글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서툰 영어를 당신이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후 저의 영어 실력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영어보다는 한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루한 보잘 것 없는 글(지루한 낙서, tedious scribble)을 읽도록 예의를 어긋나게 만든 것에 대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변함없이 당신의 신실한 제자로 남아 있습니다.
에스더 K. 박
한국, 평양에서
사랑하는 그녀의 스승 루이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1905년 10월 4일 그 당시 그녀의 건강상태, 의료 환경, 로제타와 공동사역, 재래 한국의사들의 의료인식, 그리고 에스더의 의료사역이 비교적 소상하게 담겨져 있다. 무엇보다 1900년 10월 한국에 돌아온 후 1905년 10월까지 그녀가 얼마나 초인적인 의료 활동을 했는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녀의 급성 늑막염과 결핵은 분명 상당부분은 건강을 돌보지 않는 희생적인 의료사역으로 인한 결과였다. 에스더는 1905년 7월 이후 자신의 건강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결핵과 싸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녀는 자신에게 맡겨진 의료사역을 감당해야 했다. 길고 긴 병과의 투쟁과 맡겨진 선교사역의 책무 이행이라는 두 가지 무거운 짐을 감당하느라 쇠약한 가운데 그녀는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1905년 7월 에스더가 건강문제로 의료활동을 중단하고 9월에 요양을 떠난 뒤 로제타는 혼자 의료사역을 감당하다 그녀의 건강에도 이상이 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905년 제푸에서 돌아온 박에스더는 정상적인 의료사역을 수행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건강문제로 광혜여원의 의료사역을 감당하기 힘들어 진료를 중단했다. 그것은 거의 1년 이상이 계속되었고, 그런 중에 1906년 11월 3일 화재로 광혜여원과 에디스 기념 어린이 병동도 완전 소실되었다. 1907년 에스더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녀는 로제타의 의료사역을 지원하고 전도사업도 지원했다. 소실된지 2년이 지난 1908년 10월 22일 광혜여원이 새로 건축되어 새 건물에서 의료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에스더 역시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정규의료사역에 복귀했다. 오전진료를 에스더가 맡았고 오후진료는 로제타가 맡았다. 그러나 에스더는 건강이 악화되어 오전진료마저 감당할 수 없어 오전진료를 하지 못하고 로제타가 오후진료만 담당했다. “이후 박에스더는 1910년 사망할 때까지 의료사업을 일정하게 계속할 수 없었고 병이 악화되어 병원에서 진료를 못할 때에는 번역, 주일학교, 성경학교의 일을 도왔다.” 미국에서 돌아와 조국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을 하려던 그녀의 소망은 1905년 이후 결핵으로 인해 심각한 지장을 받으며 불확실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에스더는 여전히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명단이 올려져 있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며 주변을 감동시켰다.
V. 그녀를 향한 찬사와 예비된 상급, 그리고 소천
박에스더는 1909년 4월 28일 아펜젤러, 언더우드, 윤치호, 김필순 등이 발기해 경복궁(서궐)에서 열린 대한여성교육회가 주최한 한국여성최초의 대학졸업생 환영회에서 하란사(河蘭史, 1875-1919), 윤정원(尹貞媛)과 함께 기념메달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에 로제타 셔우드와 아들 셔우드에게도 잊혀질 수 없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환영회 성황. 부인사회와 각여학교에셔 윤정원씨와 박에쓰터씨와 하란사 3인씨가 외국에셔 수업귀국하야 여자교육에 종사함과 생명에 권무함을 감사하야 거월 28일에 서궐에셔 환경회를 설하고 삼씨를 영접하야 예식으로 거행하얏는대 기 역사와 순서를 관하건대 아국 오백유여년 부인계에셔 외국에 유학하야 문며안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한 미사라. 여자학업이 종비 발달됨은 가히 찬하하갯도다.
이날 7,8백 명의 여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부인회(대한부인회), 자혜부인회(자혜부인회), 한일부인회와 여자학교들, 여성교육협회와 여성기획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환영회에는 김윤식이 개회사를, 내각 법제국장 유성준, 대한의원의육부 학감 지석영, 정동교회 담임 최병헌이 환영연설을 하고 박에스더와 윤정원 하란사 세 사람에게 ‘부인사회及여자학교 환영회기념’ 메달을 수여했다. 에스더는 셔우드 홀의 증언대로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에스더의 선교사역은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나이 34세에 중단되어야 만 했다. 1905년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에스더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의료사역을 계속 수행하고 성경학교에서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지방을 다니며 전도사역도 감당했다. 그녀는 급속하게 건강을 잃어 1909년 하반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05년 7월 잠시 중국 옌타이(烟臺)로 휴양을 떠나 휴식 기간을 가지며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계속된 의료사역으로 인해 1909년 메달을 수상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이 심해져 일상생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서울의 둘째 언니 신마리아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한국에는 결핵 요양원이 없어 전문 치료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에스더를 평생 이모 같이 사랑하고 따랐던 셔우드는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가슴아파했다. “에스더는 폐결핵에 걸려 투병 중이었는데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 그 당시 조선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요양원과 같은 시설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셔우드 홀은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에스더는 한창 사역을 감당해야 할 34세의 젊은 나이로 1910년 4월 13일 이 땅의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1900년 10월 귀국한 후 1910년 4월 13일 죽을 때까지 초인적으로 병원과 성경학교에서 봉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불꽃처럼 주를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불태우고 떠났다. 코리아미션필드는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라”(faithful unto death)에 이렇게 적었다. “비록 박 에스더는 미국에서 의사개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고국에 돌아가 그녀의 민족을 섬기겠다는 처음 가졌던 그녀의 목적을 결코 변개하지 않고 돌아와 평양에 가서 그곳에서 의료사역, 간호사역,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 그리고 복음전파사역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감당했다. 그녀는 1910년 4월 13일 결핵으로 생을 마쳤다. 죽도록 충성하라.”
1910년 4월 15일 <대한매일신보>는 “에스더 박 별셰”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부고소식을 담담히 알렸다. “미국에셔 의학을 졸업한 한국부인 에스터 박은 재작일 하오 륙시에 발셰하엿는대 본일 하오 이시에 졍동례배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한다더라.” 그녀의 추모 추도회가 1910년 5월 16일 오후 2시에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렸고, 이어 1910년 5월 27일 오후 8시 청년회관에서도 열렸다.
그녀의 죽음은 셔우드에게 정말 깊은 충격이었다. 1살 때 아빠와 할아버지를 잃고, 4살 때 여동생 에디스와 헤어지고, 여섯 살 때 할머니와 헤어지는 아픔을 경험한 셔우드가 17세 감수성이 민감한 때 사랑하는 이모 에스더와 또 다시 헤어진 것이다. 셔우드가 볼 때 에스더의 결핵과 그로 인한 죽음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봉사한 결과였다. 결핵으로 인한 에스더의 죽음은 셔우드에게 의사로서의 결단을 더욱 강하게 굳히는 전기가 되었다. 훗날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셔우드는 이렇게 고백했다.
“단지 10년 동안만 의료사역과 성경학교에서 가르친 후 에스더는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에스더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녀의 황금기에 그녀의 생명을 앗아갔고 너무도 많은 그녀의 동족 한국인들의 삶을 황폐화시켜 버리는 그 질병을 퇴치하는데 나의 온 힘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의사(T. B. specialist)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 요양원(tuberculosis sanatorium)을 세우기로 맹세했다. 이 맹세를 실천하기 위해 4년 전 닥터 하디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준 말을 수 없이 되새겼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고상한 동기도 그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이는 실현하기 힘듭니다.’”
위 글에서 우리는 셔우드 홀이 에스더의 죽음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셔우드 홀은 어릴 때부터 에스더를 ‘이모’로 그리고 에스더의 남편 박여선을 ‘이모부’로 부르고 따랐다. 그만큼 로제타 가정은 에스더 부부를 가족으로 생각했었다. 에스더의 죽음은 17살의 셔우드에게 결핵전문의가 되도록 깊은 자극을 주었다.
맺는 말
1876년 3월 16일 태어난 에스더는 자신의 34살 생일을 막 지내고 1910년 4월 13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여자 의사요, 의학박사가 한창 일할 나이에 이생을 마감한 것이다. 1886년부터 이화학당의 학생으로, 1890년부터 1894년까지 로제타의 통역과 조수로서, 1894년부터 1900년까지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는 의학도로서 그리고 1900년부터 1910년까지 10년 동안은 미국감리교 여선교회 파송 한국 의료 선교사로 그녀는 조국과 동족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결혼관도 특별하고 남달랐다. 확실히 그녀는 당대에 살면서 당대를 넘어선 시대가 감당하기 힘든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의 실천과 서양의사로서의 비전성취 그리고 조국에 돌아와서 보여준 그녀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20세기 후반 실현될 한국의 여성의 미래를 준비한 선각자였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녀는 몇 가지 중요한 족적을 이 땅에 남겼다.
첫째, 한국의 새로운 여성상(女性象)을 개척하고 심어주었다. 최초의 서양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초기 입학생으로 근대기독교육의 여성상(女性象), 기독교인의 결혼관과 새로운 스타일의 부인상(婦人象), 그리고 여성의 사회참여의 모델로 너무도 좋은 근대 사회활동의 여성상(社會活動의 女性象)을 심어주었다. 자연히 한국의 여권 신장에 놀라운 기여를 하였다.
둘째, 너무도 탁월한 의료봉사였다. 1890년 로제타에게 선택되어 그녀를 위해 봉사하며 의학에 관심을 갖고 1894년 12월 10일 18살 때 미국에 건너가 의대 준비 기간과 의대 4년간을 포함하여 6년 여간 공부하고 의학박사가 되어 1900년 귀국해 10년 동안 로제타와 함께 동역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자신의 온 젊음을 주를 위해 바쳤다. 그녀는 한국인 의사를 키우거나 양성하는 일은 하지 못했지만 선교회와 사회단체가 그녀에게 상을 줄만큼 인정을 받았다. 분명 그녀는 고난의 시대 주를 섬기며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둠을 밝힌 샛별과 같은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성취와 활동은 한국의 여성들이 너무도 본받고 싶어하는 롤 모델이었다.
셋째, 개신교의 우수성과 한국인의 우수성을 현시한 가장 훌륭한 개신교 신앙교육의 첫 결실이었다. 한국교회사에서 그녀는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심겨진 한국개신교 신앙의 씨앗의 “첫 결실”의 가장 탁월한 샘플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개신교 신앙교육의 탁월성과 한국인의 우수성을 하나로 접목시킨 너무도 훌륭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귀한 이상과 그 이상을 향한 끈질긴 노력과 성취 그리고 조국을 위한 섬김 그 근저에는 그녀가 이화학당에서 받은 기독교 신앙과 회심 경험이 있었다. 학생시절 이화학당에서의 우수성, 성실성과 근면성에 대한 로제타로부터의 높은 평가와 인정,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서의 우수한 성적,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의 헌신적인 의료사역과 봉사의 근본적 토대는 바로 그녀가 이화학당 시절 받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넷째, 그녀는 너무도 훌륭한 여성 지도자였다. 최초의 한국인 서양의사라는 교만이 그녀의 삶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의사가 되었지만 그녀는 1900-1910년 동안 낮은 자리에서 너무도 훌륭한 의료 봉사를 온 몸으로 실천했다. 비록 한국인이었지만 미국감리교 해외선교회가 파송한 여느 서양 의료선교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여성 지도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은둔의 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고 그녀를 통해 서양교육이 이 땅에서 그렇게 빨리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헌신과 죽음이 셔우드 홀이 폐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의료사역을 하도록 너무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셔우드 홀이 증언하듯 그녀의 희생적 삶과 봉사 그리고 죽음은 로제타만 아니라 그의 아들 셔우드 홀에게까지 이어져 폐결핵 전문의로 대를 이어 의료 선교사로 이 민족을 섬기도록 큰 도전을 주었다. 1910년 4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17살의 셔우드는 그녀의 생명을 앗아간 폐결핵 전문의가 되어 이 땅에서 폐결핵을 퇴치하는 일에 온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녀는 미국 크리스찬들 가운데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 중의 한명으로 이해되었다.
확실히 박 에스더는 시대를 앞선 선각자요, 최초의 한국인 서양의사요, 의지의 한국 여인이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능력의 한국여인이었다. 그녀의 민족적 사랑과 인류애적 실천은 한국인들만 아니라 서양선교사들과 서양여성의학계 종사자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도전과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한국교회사, 한국의료사, 더 나아가 개화기 한국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는 의료 봉사, 한국의 의료발전, 근대과학, 맹아 및 농아학교, 간호학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출처: 박용규, 남서울은혜교회 겨울방학 전교인 특강(2021. 1. 31).
<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생애와 사역 연표 >
1876년 3월 16일 출생
1866년 11월 이화학당 입학
1890년 10월 24일 로제타 셔우드 홀 통역 시작
1891년 1월 25일 세례
1893년 5월 24일 박여선과 결혼
1894년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와 평양으로 이동
1894년 12월 7일 에스더 부부 로제타와 함께 서울 출발
1894년 12월 10일 일본을 향해 제물포 출항
1894년 12월 21일 하와이 향해 요코하마 출항
1894년 12월 31일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1895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 항 향해 하와이 호놀룰루 출항
1895년 1월 6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1895년 1월 14일 로제타 셔우드 홀 고향 뉴욕 리버티 도착
1895년 2월 1일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 입학
1895년 7월 뉴욕센트럴 팍 방문
1895년 9월 뉴욕 어린이 병원 취직
1895년 11월 10일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소개
1896년 10월 1일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 입학
1897년 2월 1일 볼티모어 갈보리감리교회 연설
1900년 5월 14일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 졸업, 의학박사
1900년 5월 14일 볼티모어선에 졸업 소개
1900년 여름 미국 북감리교여자해외선교회 한국선교사 임명
1900년 10월 한국 귀환
1900년 12월 <신학월보> 박에스더 귀국 소개
1909년 4월 28일 금메달 수상
1910년 4월 13일 소천
1910년 4월 15일 <대한매일신보> 에스더 부고 기사
1910년 5월 16일 오후 2시에 정동감리교회에서 추모예배
1910년 5월 27일 오후 8시 청년회관에서 추모예배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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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III.-Chong Dong Dispensary, Seoul,” Fourth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Missionary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Held At Seoul, May 16 to 21, 1902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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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동(Esther Kim Park, 1877-1910)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551
“김점동 (1877-1910)”
http://sck.re.kr/scientist/%EA%B9%80%EC%A0%90%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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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사진 박용규 교수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1.01.19 13:53
- 수정 2022.02.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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