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전후 한국에는 다시 한 번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첫째 조용기 목사로 대변되는 오순절부흥운동이고, 둘째는 한경직, 김준곤으로 대변되는 대중전도운동이고 셋째 복음주의 부흥운동입니다.
195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조용기 목사는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강조와 "삼박자 축복"을 모토로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성령세례, 방언, 재림, 신유를 강조하는 그의 부흥회는 최자실 목사의 오산리 순복음금식기도원과 더불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958년 최자실 전도사와 함께 교회를 개척한 후 "신유의 복음"을 통해 좌절과 낙망에 처한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실제로 철저한 회개, 오랜 질병에서의 치유, 방언의 은사를 체험한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는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가 인도하는 집회마다 사람들 이 구름 떼같이 모여들었고, 실제로 놀라운 신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랄 로버츠를 통해 영향을 받은 그의 "3박자 축복"은 당시 희망을 상실한 민중들에게 더 없는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장 2절).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는 3중복음은 희망의 복음이었고, 그것은 조용기 목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 곧 그가 시무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한국의 오순절부흥운동의 심볼이 되었고, 한국교회 성장에 새로운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설교와 목회철학과 성령운동은 교파를 초월 한국교회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 한 예가 한얼산기도원의 이천석 목사의 부흥운동인데, 그의 부흥운동은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부흥운동 속에 범주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성령세례의 증거로 봄으로써 인격적인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몇 개의 범주 속에 축소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 같은 현상은 초기에 강했고, 현재는 성령세례의 증거로서의 첫 은사를 방언에 국한시키지 않고 여타 은사들을 수용하는 상당히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부흥운동이 한국교회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안 1970년대부터 교계 일각에서 대중전도운동이 발흥하였습니다. 이 대중전도운동은 오순절부흥운동보다 더 폭넓은 교계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체로 보수적인 교단들이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 대중전도운동은 1973년 빌리 그래함의 서울전도집회를 출발로 1974년 엑스폴로74,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로 이어져 100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한데 모여 나라와 민족과 세계선교를 놓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 대중전도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빌리 그래함, 한경직, 김준곤 목사였습니다. 70이 넘은 한경직 목사는 빌리 그래함, 마삼락 선교사와 함께 대중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을 설립하는 등 한국 복음주의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경직은 NCC 노선보다 빌리 그래함의 복음주의 노선에서 복음주의운동을 저변 확대시키는 일에 자신의 말년을 보냈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로 젊은이들을 영적인 잠에서 깨워 하나의 운동으로 결집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수백만 명이 모이는 대중전도집회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김준곤 목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 이후 제자훈련의 저변확대와 더불어, 외국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1970년대 초교파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나 한국교회 전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했던 대중전도운동의 영향 속에서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교파선교단체들의 활약에 이어 세계복음주의운동, 초교파선교단체의 발흥, 지나친 토착화운동에 대한 경계는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의 복음주의운동은 지나친 토착화 운동의 경계와 극단적인 보수주의 양극단을극복하고 전통적인 신앙은 계승하면서 대 사회적인 책임을 회복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면서 발흥하였습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KETS), 한국복음주의협회(KEF), 생명의말씀사, 아가페, 두란노서원, 엠마오, IVP출판사를 비롯한 복음주의 출판사, 그리고 복음주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신학교들의 설립은 복음주의운동을 한국 개신교의 중심세력으로 부상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을 계승하면서도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은 새로운 형태의 교회상을 심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 교회들은 기복적인 신앙에 물든 교인들에게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고, 오랫동안 뿌리내린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안목을 넓혀주었습니다.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교회들은 1980년대 이후 급변하는 사회변혁 속에서 한국교회가 위기를 만나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꾸준한 교회 성장, 건실한 교회 성장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지난 1세기의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강력한 회개가 동반된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임재로 특징되는 운동이었다면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임재가 신유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익두 부흥운동은 서민적인 언어, 틀을 넘어 서는 제스추어,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어울러져 민중들로부터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김익두 집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새 삶을 산 자들이 수없이 많았으며, 병에서 고침을 받은 자가 대단했으며, 또 신학교 문을 두드린 자들도 다수였습니다. 박형룡, 김재 준, 주기철 목사 모두 김익두 집회를 통해 은혜를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둘째, 1930년 초 이용도의 신비주의부흥운동부터 소위 입신, 방언,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부흥운동이 역사에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흥집회는 구원의 감격, 철저한 회개와 사죄의 은총, 성결과 거룩함의 추구, 새로운 삶이 강조되던 이전의 부흥회와 달랐습니다. 소등하고 기도하는 풍습이 한국교회에 정착된 것도 이 때부터 입니다.
셋째, 1950년대 6.25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일어나 교회가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이 시대 부흥운동은 6.25라는 민족적 고통을 극복하고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의 은혜를 구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대 다시 한 번 민족적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민족의 시련이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또 하나의 섭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이름으로 이단들이 등장 하여 말씀에 토대를 두지 않은 체험신앙이 복음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 사탄도 역사한 것입니다.
넷째, 1970년대 발흥한 오순절부흥운동, 대중전도운동, 복음주의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의 유산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들 부흥운동은 나름대로 특징과 장점을 지니고 있었고, 한국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회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이 단순한 은사운동, 체험의 차원으로 그치지 말고 성령의 역사가 인격적, 삶의 변화로 이어져 개인과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영적각성운동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6:07
- 수정 2021.01.12 15:22
-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