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이지만 전쟁은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전쟁이 남긴 엄청난 상처, 대체 이와 같은 비극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깊은 자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민중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초반 부흥에 대한 염원이 이 민족 가운데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세기의 전환기에 찾아온 거대한 두 전쟁,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 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서북 지역의 백성들이 주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처럼 이 나라를 "덮친 처참한 비극 속에서도 그들에게 다가온 거대한 도전"을 목도한 교인들은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 처절하리만큼 강도 높은 민족적 회개와 자성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곽안전의 말대로 "영적인 신앙의 부흥"은 시대적 요청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각성에 대한 한국교회의 요청은 한국교회의 자발적인 참여 와 외국의 유명한 부흥사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부흥사로 알려진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1952년 12월 15일 6·25 사변 중에 부산에 와서 전도집회를 열었고, 1956년에 또 다시 내한하여 서울에서 특별전도집회를 개최하여 놀라운 결실을 얻었습니다.
이미 1949년 내한하여 김치선 목사와 한경직 목사와 손잡고 다섯 번의 전도집회를 통해 해방 후 한국교회의 영적 재건운동에 크게 공헌했던 밥 피얼스(Bob Pierce) 목사가 1955년 다시 방문해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를 다니며 부흥운동을 전개해 2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1949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밥 피얼스는 초기에는 김치선 목사와 협력하면서 "3백만 구령운동"에 동참하다 김치선 목사가 전도운동 외에 사회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자 선명회(World Vision)를 설립하여 한경직 목사와 손을 잡고 전도운동과 구제운동을 동시에 전개했습니다.
비록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교회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목도한 한경직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짧은 시간에 한국 전역을 복음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시기에 우리의 힘과 믿음과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아 5년 안에 한국을 복음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경직 목사 한 사람의 견해만은 아니었습니다. 북한에서 공산정권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남한으로 피난 온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물론 전쟁의 상흔을 피부로 경험한 남한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이켜 볼 때 과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서북지역의 교회 성장을 가져왔다면 6·25전쟁은 남한 교회의 성장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부르심에 북한에서 피난 온 신앙인들이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제협약을 어기면서까지 전격적으로 단행한 27,000명의 북한군 포로 석방은 남한 교회 성장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이미 입대 전 예수를 믿거나 포로수 용소에서 예수를 영접한 절대다수의 북한군 포로들이 북한 귀환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아 교회로 영입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각 교파들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운동을 위해 총회적인 차원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52년 장로교 총회는 그 해를 전도의 해로 정하고 전도운동을 4단계로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1-3월까지는 자신의 부흥, 4-5월까지는 개인전도, 그 후 집단전도 및 교회의 지도하에 각기 전도에 주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감리교회는 1953년 웨슬리 25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특별부흥 전도의 해로 정하고 대부흥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54년 선교 70주년을 맞아 장로교와 감리교는 기념사업으로 대부흥운동을 범교단적인 차원에서 전개했습니다. 장로교회는 5개년 계획으로 전국의 면 중에서 교회가 설립되지 않은 490여 곳에 교회설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감리교 역시 100교회 설립 목표를 설정하고 교회설립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성결교도 1952년 3월에 춘계대복음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이 시대 부흥운동을 주도한 주도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1945년 9월 15일 만주에서 귀국한 이성봉 목사는 북한에서 17교회를 재건하고 1946년 3월 월남하였습니다. 이성봉은 "시대가 너무 자유주의로 흘러 교회조차 법적 질서가 없고 혼란 무질서하여 이단과 속화를 방지하기 어려우므로 이제는 내부 결속이 시급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대교회보다 작은 교회, 힘이 없는 교회들을 돌며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성봉은 1946년 4월 전국심령부흥대회에서 한국교회가 범한 일제시대 잘못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남한에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일제시대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이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는 한 교회를 담임하지 않고 전국의 가난한 교회들을 돌면서 남한의 무너진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소록도, 간생원, 여수 애양원, 대전 애경원, 부산 상애원, 인천 소생원, 금천 성애원, 창녕 소혜원 등과 같이 상처 입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방문했고, 전국에 흩어진 고아원과 양로원, 군인, 경찰, 죄수들을 방문하여 부흥회를 통해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에스겔 시대 마른 뼈와 같이 희망을 상실한 이 백성에게 영적 생명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반응도 대단했습니다. 1954년 6월에는 6사단에서 집회를 인도하여 한번에 5천명의 장병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혼탁한 시대 영적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영적 전투요원 들로 구성된 "임마누엘 특공대"를 조직하고, 1954년 5월 25일부터 1955년 4월 27일까지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돌았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작게는 1박 2일부터 일주일까지 순회집회를 가지며 전후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을 영적인 잠에서 깨웠습니다.
이성봉은 1955년 4월 임마누엘 특공대 사역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이어 5월부터 전국을 돌면서 희년준비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956년 4월까지 74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890번을 설교했으며, 4,250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교회 재건과 구제를 위해 16,930,000환의 헌금을 받아냈습니다. 이성봉은 1957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성결교회가 총회적인 차원에서 조직된 희년기념전도대를 이끌고 전국을 돌면서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집회를 열고 새벽과 낮에는 개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서울, 청주, 춘천, 양구, 원주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개최하여 1958년 4월까지 3,577명의 회심자와 3,103명의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1959년 이성봉 목사는 미국 복음주의협회(NAE) 한국 대표로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국의 여러 교회들과 기관들을 방문하여 교포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시대 부흥운동이 순기능의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6.25 이후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부흥운동 속에서 문선명, 박태선, 나운몽 같은 이단들이 등장 수많은 기성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거짓 가르침에 미혹 되고 말았습니다. 이성봉은 거짓 부흥사 박태선, 문선명, 용문산 나운몽이 일어나 미혹 "유력한 교역자와 충실한 신도들이 무수히 타락하는 것을" 목도하고 통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6:06
- 수정 2021.01.1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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