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이후에도 한국에는 크고 작은 부흥운동이 꾸준하게 계속 되었습니다. 1910년대 후반 강화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을 제외하고라도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1930년대 성결교 부흥운동과 이용도 신비주의 부흥운동, 1950년대 부흥운동,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 들입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여러 부흥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지만 그것들은 여기서 언급된 부흥운동의 한 지류 혹은 그 영향 하에 발흥한 부흥 운동으로 범주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부흥운동은 물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더해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들 부흥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1910년 이후 진행된 부흥운동의 성격과 특징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삼일운동 이듬해 1920년 한국교회는 또 한 차례 부흥운동을 경험했습니다. 이 시대 부흥운동은 주로 장로교의 길선주와 김익두가 주도했습니다. 1920년 장로교가 총회적인 차원에서 노회 별로 혹은 지역별로 1주일에서 10일간씩 전국적으로 부흥 사경회 운동을 추진하였을 때 큰 성과를 거둔 부흥운동의 지도자는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였습니다. 이들은 3.1운동 실패 이후 민족의 독립의지가 좌절된 후, 관동대지진으로 죄없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참혹하게 학살 당하는 그 민족적 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희망이었습니다.

길선주와 김익두는 전진운동으로 한국교회에 다시 옛 부흥을 사모하는 움직임과 노력들이 일고 있는 가운데 사경회 운동을 통해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 역시 기독교 밖에 없다는 의식을 민중들에게 불어넣었습니다. 이들은 한국교회 부흥사이기 전에 삼일운동 이후 암흑기(暗黑期)를 통과하는 이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이었고, 결코 하나님이 이 민족을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대변해주는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나라의 메신저였습니다.

이들은 민족적 슬픔 속에 처한 이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들은 암흑 가운데 빛나는 새벽별과도 같았고, 마치 칠흑 같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저 멀리서 비추이는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갖고 다시 일어섰으며,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대를 몸으로 겪었던 김양선 목사는 그들의 영향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에 새 빛과 희망을 주었고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설교단 하에는 거꾸러지는 경관과 죄를 자복하는 선교사가 있었고, 기절하는 신사와 강도가 있었고, 불치의 병을 고친 병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의 전도를 통하여 목사 장로 교사가 수천 명 배출되었다. 하지만 기실 한국교회와 교육계의 지도자 치고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손에 세례 받은 자 1만인 이상이오, 구도자가 수십만이라 하지만 실은 신자치고 그들의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고 한국 사람으로 그들을 통하여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는 승리한다고 외쳐서 우리의 각성을 새롭게 하여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비로소 희망에 굽힌 절망을 보았고, 모진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등불을 보았다."

 

이 시대 부흥운동은 절제운동, 농촌운동, 사회계몽운동과 함께 진행되어 부흥운동이 단순히 개인의 영적각성에 머물지 않고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삼일운동 직후 1919년부터 1935년까지 전개된 절제운동을 비롯한 사회계몽운동과 농촌계몽운동 그리고 진흥운동을 통한 한국교회 영적갱생운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정치적인 소망을 박탈당한 한국의 젊은이들과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자생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6:04
  • 수정 2021.01.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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