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운동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부흥운동의 영향과 성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첫째,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다.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대로 평양에서 발흥한 “대각성(great religious awakening)은 영적운동(a spiritual movement.)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철저한 죄의 고백과 보상이 눈에 띠게 나타났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울면서 그들의 잘못을 서로 나누느라 수업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회개는 결코 고백과 눈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상할 때 평화가 따른다. 가능한 한 모두 보상을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우리에게서 훔쳐간 돈과 물건들이 되돌아와서 그 기간 내내 거듭거듭 우리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전 시가에 사람들이 이집 저집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그들이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훔친 재산이나 돈을 돌려주었다. 전 시가지가 술렁거렸다. 한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전에 여러 해 동안 부정직하게 얻은 돈의 총액을 돌려주자 당사자인 중국 상인은 깜짝 놀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한 이후 이처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에 임한 적이 없었다.
둘째, 이 시대 부흥운동이 개인의 영적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개혁으로 이어진 일이다. 여성지위향상, 신분타파, 교육열, 의식개혁, 세계관의 변혁, 민족의식, 미신타파,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에 이르기까지 부흥운동은 사회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로 통했던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으며, 조선에 대한 명칭이 Choson에서 선민(the Chosen, 選民)으로 바뀌었다.
셋째, 만주와 중국 부흥의 모체가 되었다. 중국인 교역자 호만성(胡万成), 장석정(張賜禎)이 1907년 평양에 입국하여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그곳 교우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그들 가운데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현시되었다. 같은 해 봄에 중국 목사 유전악(劉全岳) 등 2인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가 그곳 교회 지도자들과 목단봉(牧丹峰)에서 중국에도 부흥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만주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케넷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의 지적대로 만주에서의 “놀라운 신앙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넷째, 놀라운 교회성장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하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그것은 세계선교의 기적이었다. 돌이켜 볼 때 비록 한국선교가 1884년 9월 20일 호러스 알렌의 입국으로 개신교가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한국교회가 교회로서 틀을 다진 것은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였다. 마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토대를 구축했던 것처럼 한국의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성장을 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다섯째, 해외선교운동이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때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는 중국, 블라디보스톡, 일본에 계속해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 틀을 다져갔다. 그 원동력은 바로 부흥운동이었다.
여섯째, 연합운동이다. 부흥운동은 교파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는 교육사업, 의료사역, 해외선교, 복음전도, 문서선교, 성경번역에 이르기까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부흥운동은 지난 100년간의 한국교회 영적각성과 복음전파를 견인하는 출발점이었다. 복음이 전해진 후 거의 100년이 넘도록 교회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국내외적으로 복음전도를 견인할 만큼 구령의 열정에 불타올랐던 것은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운동 이후에도 부흥운동이 한반도에서 수차례 지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09년에 시작된 백만인구령운동이다.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은 시들어 가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을 안타까워하는 일련의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절정에 달한 후 이내 시들기 시작했다. 1908년에 접어들어 교회는 성장하면서도 영적각성운동이 현저하게 시들어져 1909년 초에 이르러 그 열기가 더 한층 냉각되었다. 이것을 안타까워하던 평양장대현교회 담임목사 길선주와 개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톡스(M. B. Stokes) 리드(W. T. Reid) 갬블(F. K. Gamble)을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다시 한 번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영적각성이 이 민족 가운데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회를 가졌다. 세 명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의기투합하여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1909년 여름 길선주는 박치록 장로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을 부으셨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100만명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909년 가을에 입국한 채프먼, 로버트 학니스, 찰스 알렉산더 등 외국 부흥사들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최한 전도집회는 백만인구령운동의 열기를 한 층 북돋아주었다. 비록 목표한대로 100만 명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이 땅의 민족복음화를 염원하며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백만인구령운동 이후에도 1920-21년 사이 김익두를 통한 부흥운동, 1932-33년 사이 성결교부흥운동, 1950년대 부흥운동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대중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는 부흥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부흥의 역사는 평양대부흥운동과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미약했다.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꾸신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이 다시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 모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겸손한 시도에서 고백한대로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서나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땅에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의 끊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의 가도를 달리는 음란의 도시들이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이때 우리의 유일한 참된 소망은 “성령의 비상한 섭리” 곧 놀라운 부흥에 있다. 오 주여! 다시 한 번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 땅을 고쳐주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그 때 임하셨던 성령이여 다시 한 번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6:04
- 수정 2021.07.0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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