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교회사는 근대교회사와 현대교회사가 하나로 합쳐져서 불리는 명칭이다. 근대교회사는 1648년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부터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를 말한다. 미국을 기준으로 할 때는 1648년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부터 1861년 남북전쟁까지 기간을 말한다. 근세(Neuzeit)는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사고와 문화전반이 변천을 맞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슈미트(Kurt Dietrich Schmidt, 1896-1964)는 1648년 이후 근세교회사를 “개인주의와 세속주의 시대의 교회사”로 규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에른스트 트럴취(Ernst Troeltch, 1865- 1923) 역시 근대의 특징을 “인간 정신의 해방”에서 찾았다. 근대의 사상적 조류를 대변하는 계몽주의는 “하늘의 뜻에 대한 절대순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근세는 중세의 신률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하나님, 세상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정립하는 기간이었다. 인간은 타율적인 존재에서 자율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도 변화가 찾아왔다. 국가와 교회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지녔던 중세 이전, 심지어 종교개혁시대와는 달리 근세에 접어들어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기 시작했고, 세속적인 문화와 종교적인 이념도 분리되었으며, 새로운 교파의 발흥으로 타교파와 교단에 대해 관용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개신교 정통주의
종교개혁 이후 신앙고백 시대와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정통주의는 루터파 정통주의와 개혁파 정통주의로 대별된다. 루터파 정통주의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을 특징 짓는다. 루터파 정통주의의 대변자는 루터의 뒤를 이어 루터의 신학을 집대성한 필립 멜랑히톤과 마틴 쳄니츠, 그리고 레온하르드 후터(Leonhard Hutter, -1616)였다. 개혁파 정통주의는 베자에게서 출발했다. 칼빈의 신학은 베자에 의해 좀 더 사변적으로 흘렀다. 베자는 제한속죄, 타락전 예정론을 견지하고 정부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칼빈보다 더욱 과격해 반란을 선동할 정도였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섭리와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강조했던 칼빈과는 달리 그의 후계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하였다. 또한 구원론에서 예정론을 다루었던 칼빈과 달리 그의 후계자들은 처음부터 예정론을 신론에서 다루었다. 본래 칼빈이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더해주기 위해 구원론 다음에 예정론을 다루어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과 구원의 확신을 도모하기를 원했으나 베자를 거치면서 예정론이 신론의 한 범주로 정착되고 말았다.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로마 가톨릭주의, 교리주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반대하고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바, “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바로 이것이 계몽주의의 모토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성의 역할을 매우 중시했다. 이점에서 계몽주의는 소시니안주의와 사상적 유대를 갖는다. 학적으로 계몽주의는 18세기 독일에서 형성된 근대 기독교 사상운동으로 라이마루스(H. S. Reimarus), 레씽(G. E. Lessing), 그리고 헤르더(J. G. Herder)와 관련된 사조를 일컫는다. 이들은 초자연적 종교를 반대하고, 인간의 이성의 중요성을 확신했으며, 인간의 삶의 행복을 극대화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과거 계시의존의 신앙을 경험과 이성에의 의존 신학으로 전환시켰다. 계몽주의는 자율, 이성, 자연과 낙관주의, 그리고 진보와 관용과 세속화를 특징으로 한다. 계몽주의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꽃피웠다. 계몽주의는 개인주의 발흥을 촉진하고 이성과 자율을 강조하였다. 계몽주의는 자연히 정치적 자율 사상을 낳았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탈교리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정통주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루소, 버틀러, 흄, 칸트에 의해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
경건주의운동과 각성운동
정통주의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전통을 떠나 사변주의로 흐르면서 경직된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로 스페너, 프랑케, 진젠돌프로 대변되는 경건주의운동이 발흥했다. 교리를 강조하면서도 회심을 중시했던 청교도운동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이어주는 다리(bridge) 역할을 했다.
경건주의운동은 한편으로는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극복하는 원동력이었다. 교리를 강조하는 정통주의자들과 달리 경건주의자들은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하였다. 경건주의는 교회를 갱신하고 해외선교를 촉진하며, 대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무엇보다도 부흥운동의 촉매 역할을 하였다. 존 웨슬리의 영국복음주의부흥운동, 조지 휘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한 미국 1차 대각성운동, 이어 19세기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 복음주의 해외선교운동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라토렛이 말한 ‘위대한 세기’가 도래할 수 있었다.
현대교회사
현대교회사는 유럽을 기준으로 할 때는 프랑스혁명 이후, 미국을 기준으로 할 때는 1861년 남북전쟁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 유럽에서는 구자유주의가 발흥하여 전통적인 신앙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독일로부터의 고등비평, 영국으로부터의 진화론, 국내에서의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인한 영적가치 중심에서 물질가치 중심으로의 변천으로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이 일어났다.
19세기 독일에서 구자유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독일에서 일어난 고등비평과 공산주의 발흥, 영국의 진화론,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교회가 위기를 맞았다. 영국에서는 1846년 복음주의연맹(Evangelical Alliance)을 결성하여 자유주의 도전에 맞섰고, 미국에서는 근본주의운동이 일어나 현대주의에 맞섰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기독교를 조정하려는 현대주의자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지키려는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에서 현대주의가 승리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영향력 상실의 결정적 요인은 근본주의운동의 분열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1920년대까지 연합과 연대를 통해 현대주의에 효과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근본주의는 분열로 인해 급격하게 영향력을 상실하고 소수의 모반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틈을 타고 등장한 세력이 신정통주의였다.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신정통주의가 발흥하면서 주류 교단들과 신학교들이 대거 신정통주의로 넘어갔다.
근본주의운동이 분열되고 신정통주의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안 복음주의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복음주의운동은 역사적 기독교를 지키면서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1946년에 결성된 WCC는 처음 의도와 달리 진보주의 방향으로 흘렀다. 신정통주의자들이 WCC운동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반면 1946년 결성된 ICCC는 극단적 분리주의로 인해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반면 복음주의운동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계승하고 연합운동을 전개하며 가장 영향력 있는 신앙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서구의 기독교가 세속화 길을 걸은 반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기독교는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놀랍게 성장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기독교의 중심축이 서구에서 소위 제 3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박용규, 근대교회사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6)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5:42
- 수정 2020.12.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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