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주역들 (앞줄 오른쪽부터 존 칼빈, 얀 후스, 마르틴 루터, 필립 멜란히톤)
종교개혁의 주역들 (앞줄 오른쪽부터 존 칼빈, 얀 후스, 마르틴 루터, 필립 멜란히톤)

 

종교개혁사는 외형적으로는 15171031일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 포문을 열 때부터 1648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이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루터, 츠빙글리, 칼빈에 의해 주도된 대륙의 종교개혁,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프랑스와 네덜란드 종교개혁, 재세례파에 의해 진행된 급진종교개혁운동,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대별된다. 종교개혁사는 종교개혁의 발단과 위에서 언급된 종교개혁의 역사적 흐름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는가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주로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관점이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을 루터 자신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종교개혁을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맞선 교리적 개혁, 도덕적 개혁으로 보지 않는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둔 요인도 윤리적, 교리적 개혁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반교권주의(anti-clericalism)와 독일의 민족주의(nationalism)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둘째, 종교개혁의 발생요인을 교회의 윤리적 타락에서 찾으려는 도덕적 해석(Moral Interpretation)이다. 이 해석은 종교개혁을 중세 로마 가톨릭의 수많은 도덕적 타락을 일소하고 정화해준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셋째, 종교개혁을 본질적으로 교리적 해석(Doctrinal Interpretation)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다.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일차적으로 종교개혁을 잘못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회복하는 신앙운동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다. 넷째, 사회학적 해석(Sociological Interpretation)이다. 예일대학교 롤란드 베인톤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요인으로 도시화(urbanization), 상업주의(commercialism), 민족주의(nationa lism), 그리고 제후와 제후의 권력투쟁(power struggle)을 들었다. 다섯째, 막스주의(Marxist Interpretation) 해석이다. 막스주의는 종교개혁을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으로 해석한다. 과거 동독에서는 루터를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몰아내는 상황 속의 인물로 묘사하였다. 동독은 종교개혁 기념 축제를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기념하여 왔다.

이들 다섯 가지 해석 중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둘째, 셋째, 넷째 해석이다. 이들 세 가지 해석은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종교개혁이 일어난 요인을 어느 하나에 제한시키는 것은 종교개혁의 발단을 축소하거나 자칫 왜곡시킬 소지가 있다. 당시 교리적 부패와 사회적, 윤리적 부패는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며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재발견에서 출발했지만 윤리적 개혁, 사회적 개혁, 국가적 개혁을 수반했다. 루터 자신이 보여주듯 그 자신의 신앙개혁이 루터 개인의 삶의 개혁으로 다시 루터가 속한 공동체와 더 나아가 독일전역과 전 유럽의 신앙개혁, 윤리개혁,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던 15171031일에는 종교개혁기운이 교회에 가득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여 오셨다. 종교개혁 전야의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황권의 부패와 부의 축적은 교권의 부패와 연결되었다. 그 시대만큼 종교적인 시대도 없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당시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신학적 자질은 물론 도덕적인 자질도 보여주지 못했다. 교회의 부패로 교회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중세 말기 교황권의 부패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교리적인 타락은 또한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과 고전을 연구하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들은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한 삶, 수도원 제도, 중세 스콜라신학의 모호성 등 당시의 부패한 종교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막상 종교개혁이 터지자 에라스무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둘로 나뉘었다.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각오하면서까지 개혁을 외치는 이들과 교회의 일치를 앞세우며 로마 가톨릭에 잔존하려는 이들이다. 성어거스틴수도원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개혁사상을 강하게 불어넣어준 요한 스타우비츠도 로마 가톨릭에 잔존하였다.

 

대륙의 종교개혁

루터에 의해서 포문이 열린 개신교 개혁운동은 츠빙글리와 칼빈에게 계승되면서 한층 더 다듬어졌다. 루터는 개혁의 포문만 연 것이 아니라 1520독일민족의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 기독교인의 자유 등 개혁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책자들을 출간하여 종교개혁의 사상적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루터는 15229월 독일어로 신약을 완역하여 성경을 사제들의 손에서 민중의 손으로 옮겨주어 성경에 토대를 둔 개혁운동을 가능케 했다.

츠빙글리는 많은 개혁파 신학을 체계화시켰다. 그는 강해설교를 귀중하게 여겼으며, 교육목회를 추진하였고,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급진적인 예전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또한 평신도 훈련을 발전시켰으며, 개혁주의 예정론과 성례론의 기초를 놓았다. 재세례파, 루터주의자들과의 논쟁은 츠빙글리의 후기 사역에 방해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주()들과의 적대적인 관계로 카펠전쟁(1531)이 발생해 츠빙글리는 그 전쟁에서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 논쟁은 종교개혁이 직면한 가장 큰 시련이었다. 츠빙글리와의 성만찬 논쟁으로 인해 루터의 종교개혁은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루터는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성만찬 논쟁에 쏟아 부었고, 성만찬 논쟁으로 인해 개신교 종교개혁은 심각한 분열을 맞고 말았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극심한 대립이 부처와 칼빈에 의하여 어느 정도 중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만찬 논쟁은 종교개혁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진정한 개혁운동을 방해한 복병이었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다른 부차적인 문제는 관용해야 한다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마르틴 부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개혁자들이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관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3년 동안 피난민 교회를 맡아 섬기면서 성숙한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그가 1541년 제네바로 돌아와 예배를 개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도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3년 동안의 훈련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칼빈 주변에 모여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를 찾았다. 칼빈은 자신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오는 학생들의 가슴에 개혁사상을 심어주었다.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낙스도 이곳에 머물면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준비했다. 1541년에 출간된 제네바 성경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촉진시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칼빈의 영향을 통하여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형성되었고 영국과 미국에서 청교도운동이 일어났다. 칼빈이 개혁의 불길을 높이 들면서 제네바는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중요한 한 갈래는 급진개혁운동이다. 사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급진종교개혁(Radical Re- formation)과 대별하여 고전적 개혁(Classical Reformation), 행정적 혹은 관료적 개혁(Magisterial Reformation)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들의 개혁이 국가나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재세례파에 의해 주도된 종교개혁은 교회와 정부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분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재세례파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츠빙글리였다. 처음 재세례파는 이름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재세례파를 뜻하는 아나뱁티스트는 다시 세례를 받는 자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성경적 개혁을 추구하였고, 이들의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당히 일치하였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만인제사장원리,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인의 영적회심과 중생을 철저하게 견지했다. 하나님의 속성,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대속의 십자가, 그리고 성경의 권위 문제에 있어서는 개혁자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이들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가르침을 수용하면서도 국가관과 세례관에 있어서 재세례파의 독특한 가르침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인 성인 세례만을 인정하고 국가교회를 거부했다. 그것은 유아들이 세례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은 이들로 구성된 자신들만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룩하길 원했다. 이들의 교회관, 국가관, 세례관은 자연히 전통적인 입장과 달랐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가, 로마 가톨릭, 종교개혁의 주류들로부터 수많은 박해를 받았다. 이 급진적인 개혁자들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이 대륙의 침례교의 뿌리가 되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필립 샤프의 말대로 루터의 개혁은 요원의 불길처럼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의 저술과 종교개혁사상이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포드대학은 종교개혁의 중심이었다. 토마스 빌리(Thomas Bilney), 휴 래티머(Hugh Ratimer), 마일즈 코버데일(Myles Coverdale), 매튜 파커(Mathew Parker),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포진하고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은 작은 독일이라고 불렸다. 특히 틴데일의 성경번역과 클래머의 개혁운동은 헨리 8세 치하의 영국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이 정치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 1532년 헨리 8(1509-1546) 치하에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이 있은 후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559년 엘리자베스 통일령(Elizabe than Settlement)은 그 결실이었다. 통일령은 좀 더 보수적인 개혁을 원했던 엘리자베스와 좀 더 급진적인 개혁을 원했던 사람들 사이의 중재안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칼빈주의와 루터교의 절충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국에서는 개신교 신학을 중시하면서도 제도와 예전에서 가톨릭에 더 호의적인 영국국교가 태동되었다.

제네바에서 4년의 세월을 지낸 존 낙스는 1559년 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한 후 스코틀랜드에서 강력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다. 낙스는 메리 여왕에 맞서 미사제도를 반대했고, 우상을 타파하고 칼빈에게서 배운 종교개혁의 원리를 스코틀랜드에서 실천에 옮겼다. 그의 개혁은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낙스의 개혁운동으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가 조직되고 수많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프랑스 위그노 종교개혁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에 의해, 스위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에 의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에 의해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프랑스에서 위그노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65개 대학과 종교 단체들의 영향으로 교황의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고위 귀족들과 대부분의 농부들은 가톨릭교회를 고수한 반면 하위 귀족들, 상인들, 중하층 계급의 전문 직업인들 상당수는 위그노인들이었다. 프랑스의 통치자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운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의 개혁운동을 지지하기는커녕 개혁자들을 처형했다. 1545년까지 수천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22개 도시와 마을이 파괴당했다. 위그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1547년 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나고 왕위를 계승한 앙리 2(Henry ) 역시 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 수많은 위그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제네바로 떠났다. 제네바에서 훈련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프랑스 앙리 2세는 개혁의 불씨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행상인들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가정, 직장, 이웃 사이에 종교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정부는 인쇄소의 인쇄물을 정기적으로 검열했고 프랑스 영내로 들어가는 모든 화물들을 검색했다. 그토록 박해를 가하던 앙리 2세가 1559년 마상시합을 하다 미처 피하지 못하여 창이 그의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위그노에 대한 박해는 중단되지 않았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프란시스 2세와 샤를르 9(Charles )도 선왕의 뒤를 따라 위그노를 박해했다. 1572824일 성 바돌로매의 날, 자정 성의 종소리와 더불어 위그노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성 바돌로매의 대학살은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개신교 신앙 때문에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대학살의 소식을 듣고 흡족해 했고,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매우 기뻐서 축포를 쏘고 모든 교회가 종을 울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축제 분위기로 로마는 3일 동안 밤에는 불을 끄지 않았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

그토록 잔인하게 위그노를 학살했던 24살의 젊은 샤를르 9세는 대학살의 사건이 있은지 불과 2년 만에 간헐적인 발작 증세와 회한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앙리 2, 아들 프란시스 2세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샬를르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앙리 3세도 시해당하고 말았다. 그토록 개신교를 박해했던 역대 왕들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앙리 3세의 뒤를 이은 앙리 4세는 낭트 칙령(Edict of Nante, 1598)을 통해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양심의 자유가 주어졌고, 위그노들이 특정한 지역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위그노들이 시민의 권리를 회복하고 자유롭게 학교를 세우고 특정한 지역에서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낭트 칙령은 앙리 4세가 통치하는 동안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러나 앙리 4세가 1610년 예수회에 의해 암살당한 후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재개되었다. 위그노에 대한 박해는 그 후 지속되어 위그노들은 1629년 예배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외 모든 권리를 앗아간 알래 강화안(the Peace of Alais)을 받아들여야 했다.

 

네덜란드 종교개혁

우리에게 화란으로 더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에는 개신교가 일찍이 꽃피웠다. 북구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거점이 이곳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을 가능케 만들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 대변자 에라스무스 역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태생이었다. 네덜란드가 종교개혁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이었다. 이들은 가톨릭에 잔류하면서 개혁정신을 확산시켜 나갔다. 종교적 성향과 개혁적 성향 때문에 종교개혁운동이 이곳에 전파되자 네덜란드인들은 종교개혁을 환영했다. 이곳에서는 루터의 개혁정신보다는 칼빈의 개혁정신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네덜란드인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주권적인 은혜 사상은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미래를 설계하는 네덜란드인의 민족정신과 잘 조화를 이뤘다.

당시 네덜란드의 통치자 카를 5세는 개신교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1523년부터 1555년 카를 5세가 재위하는 동안 추기경과 교황에 의해 수많은 개신교들이 화형 혹은 교수형을 당했고 심지어 생매장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정신은 이런 외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개신교 박해로 인해 네덜란드의 많은 개신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터는 박해 받고 있는 브라반트 흘란더스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했다. 거룩한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통일시키려던 카를 5세의 계획은 오히려 순교를 각오한 수많은 개신교들의 등장을 가져왔다. 박해를 통해 기독교가 더욱 확산된 것이다.

1566년 필립 2세는 파르마의 마가렛을 통해 네덜란드의 개신교 박해를 명령했다. 자기가 통치하는 국가의 모든 백성들이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필립의 요구대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박해를 받았다.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알바 공작은 이들을 심문하고 처형하기 위해 피의 심사회”(The Council of Blood)를 설치하였다. 수천 명의 개신교도들이 교수형으로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영국이나 독일로 피신했다.

네덜란드의 개신교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필립 2세의 개신교 정책을 반대한 사람이 바로 침묵의 윌리엄(William the Saint)으로 널리 알려진 오렌지의 윌리엄(William of Orange)이었다. 독일 태생으로 카알 5세의 근위대를 지낸 윌리엄은 철저한 개신교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처음 루터교 신앙을 가졌다가 후에 칼빈주의로 회심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알바 공작에 대항했고, 수많은 네덜란드인들이 그의 뒤를 따라 스페인에 반기를 들었다. “잔인한 악마의 화신으로 통했던 알바의 군주적 횡포가 네덜란드인들의 힘을 더욱 결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소위 바다의 거지(Gueux de Mer)로 알려진 네덜란드인들이 결성한 군대가 해상에서 스페인의 군대에 성공적으로 맞섰다. 이들은 네덜란드인들의 특별한 민족적 응집력을 가지고 거대한 스페인 군대와 맞서 싸웠다.

1609년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12년의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것은 사실상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인정하는 협정이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Treaty of Westphalia)을 통해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로마 가톨릭, 예수회의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개신교가 가장 꽃피운 나라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개신교 종교개혁이 놀랍게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동안 가톨릭 안에서도 일종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될 즈음에 로마 가톨릭 안에서도 두 가지 움직임이 일어났다. 첫째, 교리적인 면에서 개신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하여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가 열렸다. 둘째, 신교개혁에 자극받아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개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반종교개혁이라 부른다. 대표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와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였다. 로욜라는 1534년에 예수회(Jesuits)를 창설하여 로마 가톨릭의 갱신을 촉진하고 신교의 종교개혁의 불길을 진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예수회는 개혁과 선교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17세기에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선교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대표적인 사람은 프란시스 사비에르, 로베르토 드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 마태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다.

예수회 조직에 직접 참여한 사비에르는 1541년 인도 고아에 진출하여 8년 동안 무려 10만 명 이상의 개종자를 낳았고, 1549년 일본에 건너와 2년 동안 1,500명의 개종자를 낳았다. 이후 일본에서는 예수회 신자들이 놀랍게 증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침략군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회 신자들이었다. 예수회는 로마 가톨릭에 선교열을 불어넣어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서 놀라운 선교확장이 이루어졌다.

로마 가톨릭 선교가 한창 진행되던 17세기에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상국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주로 청교도, 퀘이커 그리고 침례교도들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의 탄압을 피해 루터파와 개혁파 기독교인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던 것도 17세기였다.

 

 

참고문헌:

유스토 존잘레스, 종교개혁사 (서울: 은성, 1988)

김의환, 기독교회사 (서울: 총신대출판부, 2000)

김영재, 기독교 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0)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5:41
  • 수정 2020.12.1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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