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

흔히 중세사라고 하면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혹은 590년 그레고리 1세의 즉위부터 15세기까지를 말한다. 중세교회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는 바로 수도원 제도와 교황제도이다. 수도원 제도가 생겨나고,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성경을 떠난 전통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해 받는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 이후 군림하는 기독교로 바뀌면서 교권과 교황권이 강화되었다. 이것은 결국 중세의 타락을 가속화시킨 요인이었다.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 공동체가 이제는 피라미드 구조의 제도적 교회로 변모하였고, 교황의 권위가 점점 더 강화되어 교황은 절대 권력을 가진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다. 서서히 성경에서 떠난 신학이 형성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신학이 교권의 시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전 서구 기독교회는 물론 서구 사회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스콜라철학의 대두로 신학이 발전했고, 수도원의 발달로 영적갱신운동이 촉진되었다. 물론 스콜라주의와 수도원운동은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중세 기독교를 특징 짓는 사건은 이슬람의 발흥과 동서방교회의 분열, 십자군 전쟁, 수도원 제도, 중세스콜라주의, 교황제도의 부패, 종교개혁 전야의 기독교이다.

 

이슬람 발흥과 동서방교회 분열

중세기독교가 가장 먼저 직면한 사건은 이슬람의 발흥과 동서방교회의 분열이었다. 이슬람교의 발흥은 기독교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무함마드(Muhammad, 570-632)622년 메카(Mecca)를 떠나 메디나로 옮김으로써 시작된 이슬람교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걸쳐서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8세기에는 프랑스 남부까지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 후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무서운 라이벌로 등장했다. 이슬람의 도전으로 기독교는 살아남기에 급급하였다. 이슬람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를 비롯한 과거 기독교의 중심지들을 다 정복했다. 교황은 800년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샤를마뉴를 황제로 옹립하였지만 고대 서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이슬람세력의 도전 못지않게 중세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는 동서방교회의 대립과 분열이었다. 동방교회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과 서방교회의 중심인 로마는 서로 성향이 달랐다. 콘스탄티노플은 헬라의 영향이 강했고, 로마는 전형적인 라틴사상과 라틴정신이 지배했다. 동서방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예배와 교회 풍습이 달라졌다. 서방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한 반면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신학도 달랐고, 마리아 이해와 성상에 대한 견해도 달랐다. 동서방교회 대립은 692년 동방감독들로 이루어진 제2차 투룰리안 대회(Trullian Synod)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필리오쿠에’(Filioque)를 삽입시키자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급기야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파송한 특사 훔벌트가 1054716일 대표적인 동방교회 소피아성당에서 교황의 이름으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세루라리우스에게 파문장을 던지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세루라리우스도 교황에게 파문장을 던짐으로 동서방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맞았다. 150년 후 1204년 서방교회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를 약탈하고 수많은 고아들을 살해하면서 동서방교회 분열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십자군 전쟁

동서방교회가 분열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96년부터 1270년까지 거의 2세기 동안 십자군 전쟁이 중세 유럽의 기독교를 지배했다. 십자군운동(The Crusades)은 이슬람에 의해 빼앗긴 성지를 다시 탈환하고 1054년 분립된 동서방교회를 하나로 다시 연합하겠다는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그레고리 1세 이후 선행과 공로에 대한 강조로 성지 순례를 공로축적의 한 계기로 인정하면서 성지 순례를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였다. 그러나 1073년 터키가 성지를 점령한 후 성지 순례는 너무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제일 심한 타격을 받은 곳은 비잔틴 제국이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 1세는 당시 교황 우르반 2세에게 터키군의 횡포를 견제해달라는 청원을 요청했고 우르반 2세는 10951126일 프랑스 클레르몽(Clermont)에서 열린 회의에서 십자군운동을 선언했다. 그는 성지탈환이야 말로 이교도들에 의해 약탈된 성지를 다시 회복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약속 받는다며 십자군을 독려했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기독교를 결집시키고 제 8차에 이르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약 1세기 동안 성지를 탈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이 다시 성지를 점령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해석은 복잡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십자군 전쟁이 중세기독교에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을 강화하고, 교회에 부를 축적하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동서방교회의 분열을 더한층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다른 한편으로 십자군 전쟁은 동서 교류를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고, 민족과 국가의 단결을 강화시켰으며, 과거 고립된 유럽의 제국들이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전했으며, 화폐가 통용되고 새로운 계급, 부르조아가 등장했다.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의 군주시대가 생겨난 것도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었다.

 

중세수도원운동 (클루니, 도미니크, 프란시스)

이런 중세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고 약 10세기부터 영적갱신운동이 서방교회 전역에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910년에 창설된 클루니수도원이다. 우리가 이 수도원을 주목하는 것은 클루니수도원이 중세 사회의 영적 갱신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클루니수도원은 엄격한 베네딕트(Benedict)수도원의 순결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세워졌다. 클루니수도원은 베네딕트수도원과 노선을 달리했다. 베네딕트수도원이 수도사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한 반면에 클루니수도원은 수도원과 사회를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수도원의 개혁의지는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그들은 성직 매매를 근절하고 독신 생활을 부활시켰으며 교회의 부패를 제거하는 등 영적갱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클루니수도원의 개혁의 특징은 이들이 개혁의지를 갖고 있는 교황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교황 그레고리 7(Gregory , 1025-1085)였다.

클루니수도원의 뒤를 이어 클레르보드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와 시토수도회,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182-1226)수도원, 도미니크(Dominic de Guzman, 1170-1221)수도원이 성공적으로 영적갱신과 교회개혁을 시도하였다. 도미니크수도원과 프란시스수도원은 클루니수도원과 시토수도원이 이룩해온 수도원 개혁을 계승하면서 수도원운동을 큰 힘으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으로 밀려온 동방의 사치를 배격하고 낡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니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당시 중세의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매우 의미 있는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클루니수도원과 시토수도원이 자신들의 개혁을 수도원의 울타리에 가두었으나 도미니크와 프란시스 두 수도원 수도사들은 세상으로 나가 금욕적인 삶을 통해 세상으로 그 개혁을 확대해 나갔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중세의 사회개혁자,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교회개혁과 갱신운동은 선교사 파송으로 이어졌다. 프란시스는 이슬람 선교를 시작하였고, 스칸디나비아인들과 폴란드인들이 개종하였다. 동방교회는 9세기에 동부 유럽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슬라브 민족을, 10세기에 러시아인을 개종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동방교회로부터 선교를 전해 받은 러시아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할 만큼 급성장하였다.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서 러시아의 황제들은 러시아를 3의 로마라고 불렀다.

 

중세 스콜라주의

십자군 운동은 동서 교류를 통해 단순히 상업과 문화적 교류의 차원을 넘어 동방의 철학과 학문을 서방에 도입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자연히 동방에서 번성하던 철학과 사상이 십자군 운동을 통해 서방으로 유입되어 학문적 교류의 길을 터 주었다. 이중에서도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유입되고 널리 보급되어 스콜라철학이 번성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 수도원은 교회에 개혁과 갱신을 제공한 것 외에도 신학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특별히 12세기와 13세기는 기독교사상의 황금기였다. 비록 후대 중세말엽의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같은 대단한 열정은 아니지만 고전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일기 시작했다.

각 수도원과 도시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학문의 수용에 앞장섰고 대학 설립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다. 이 시대에 설립된 대학들은 1180년에 설립된 볼로냐(Bologna)대학과 몽펠리에(Montpellier)대학, 1200년에 설립된 파리대학과 옥스포드대학, 살레르노(Salero)대학, 1365년에 설립된 비엔나대학, 1379년에 설립된 에르푸르트대학, 그리고 1385년에 설립된 하이델베르그대학이다. 이 중 볼로냐대학, 파리대학, 옥스포드대학은 중세의 인재 양성의 센터가 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설립된 수많은 대학과 학교들은 많은 교사들을 배출했고, 신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학문운동이 이들 학교(Scholae)를 통해 진작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중세의 학문연구운동을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불렸다. 스콜라주의는 11세기 중반 안셀름(1033-1109)이 등장하고부터 윌리암 옥캄(1280-1347)이 활동했던 14세기 중엽까지 중세의 지성사를 장식했다.

스콜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로는 캔터베리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 피터 아벨라드(Peter Abelard, 1079- 1142), 롬바르드 피터(Peter the Lombard, 1100-1164), 헤일스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85-1245),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3), 존 보나벤튜라(John Bonaventura, 1221-1274),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6-1308), 윌리암 옥캄(William Occam, 1280-1347)을 들 수 있다. 이성과 계시, 자연과 은총의 관계는 스콜라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 기간 기독교사상은 교황 이노센트 3(Innocent , 1198-1216)의 영향으로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의 지도력 아래 중세교회는 문화적, 신학적, 정치적 절정을 맞았다. 스콜라 신학은 중세의 가톨릭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다.

실재론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여 신앙의 위치를 평가 절하시키고 말았지만 실재론에 반대하여 일어난 유명론을 통해 신앙의 위치와 성경의 권위가 다시 회복되었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수도원의 신비주의 운동과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태동시키는 동인을 제공해주었다.

 

교황권의 발달과 몰락(1198-1303)

교황권은 중세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중세의 교황권의 문제는 교황과 황제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황제 헨리 4세의 대립과 갈등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이노센트 3(Innocent , 1198-1216)가 교황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황제와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노센트 3세는 교황권을 대단히 발전시켰다. 그의 영향력은 프랑스, 영국, 스페인, 그리고 심지어 아일랜드, 불가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까지 확대되었고 황제 선출을 좌우할 정도였다. 그는 무력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방교회를 서방교회의 교황의 수중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이노센트 3세는 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 1215)를 소집하여 공의회에서 화체설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고, 여러 이단들을 정죄해 중세 가톨릭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보니파스 8(Boniface , 1294-1303)는 선임자의 영광을 제대로 이어가지를 못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한층 높이기를 원했지만 교황권의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그 후에 진행된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1309-1377)라 불리는 로마교황청의 아비뇽 이주와 이어 진행된 서방교회의 대분열(1378-1423)은 교황권의 몰락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14세기와 15세기 중세교회는 침체 국면을 맞았다. 침체의 주된 요인은 교황권의 부패와 몰락이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거의 70, 14세기의 거의 대부분을 장식했던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 이후 서방교회는 또 다시 1378-1423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대분열의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이 바벨론 70년 포로기간동안 재임했던 교황 클레멘트 5(1303-1314), 요한 22(1316-1334), 베네딕트 12(1334-1342), 클레멘트 6(1342-1352), 이노센트 6(1352-1362), 우르반 5(1362-1370), 그리고 그레고리 11(1370-1378)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교황 로마의 우르반 6(1378-1389)와 반 교황 아비뇽의 클레멘트 7세의 대립을 시작으로 유럽은 둘로 나뉘고 말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아비뇽의 클레멘트를 지지한 반면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로마의 우르반 6세를 지지하였다. 국가적 이해관계와 맞물린 종교적 대립과 정치적 대립으로 유럽은 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종교개혁 전야의 유럽 기독교

세속권세와 교황의 대립, 교황의 난립으로 교회는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교회개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종교회의, 르네상스 휴머니즘, 그리고 왈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에 의해 교회개혁이 진행되었다. 성경의 최종적 권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만인제사장원리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사상을 이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reformers before the 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일련의 종교회의(피사회의, 콘스탄스회의, 바젤회의), 르네상스 휴머니즘,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은 종교개혁 전야의 유럽 기독교를 특징 짓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들이었다. 이들 셋은 비록 성격도 다르고 발흥 배경도 다르지만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배경을 제공했다. 종교회의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1409년부터 1449년까지 4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진행된 것이지만 교황권의 난립으로 인한 서방교회의 분열을 봉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 특히 북구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성경과 고전연구를 통해 종교개혁에로의 길을 준비하였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초대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켜 초대교회 문헌과 성경을 통해 당대를 평가하고 조명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었다.

중세는 이슬람의 도전, 교황권의 부패,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타락으로 복음의 빛이 가리어진 어둠의 시대였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셔서 당신의 교회를 이끌어 가셨다. 역사가 인간들의 무대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그 속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인간의 죄악들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조용히 그러면서 줄기차게 확장해 나가셨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역사(history)를 그분(His)의 이야기(Story)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최형걸, 중세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0)

유스토 콘잘레스, 중세교회사 (서울: 은성, 1987)

정원래, 중세교회사 강의안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5:40
  • 수정 2020.12.1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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